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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9년(세종21)∼1495년(연산군1) = 57세]. 조선 전기 세조~성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강(子强)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참판 성순조(成順祖)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도조(度祖)의 증손자 이란(李蘭)의 딸이다. 예조 판서 성석연(成石珚)의 증손자이고, 영의정 성준(成俊)의 동생이다.
[세조∼예종 시대 활동]
1462년(세조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68년(세조1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고,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을 거쳐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다. 1469년(예종1)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구치관(具致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467년(세조13) 조선과 명(明)나라의 연합군이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여 대추장 이만주(李滿住) 부자(父子)를 잡아 죽였는데, 그 잔당이 이 해에 국경을 침입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구치관을 진서대장군으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형 성준(成俊)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출몰하는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는 대책을 건의하였다.
[성종 시대의 활동]
1475년(성종6) 사헌부에 들어가서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사도시(司䆃寺)첨정(僉正)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 ·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1483년(성종14)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 1486년(성종17)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는데, 성종의 신임을 받았다.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87년(성종18) 병조 · 예조의 참판을 거쳐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1488년(성종19)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을 다녀왔는데, 의방(醫方)에 관한 『동원습서(東垣拾書)』을 구하여 와서 바치니, 성종이 안장 갖춘 말 1필을 내려주었다. 1489년(성종20)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달천(達川) 천방(川防)을 직접 가서 살펴보았다. 1491년(성종22)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 좌참찬(左參贊)을 거쳐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조 판서로서 세자 좌빈객(左賓客)을 겸임하고, 예조 판서로 옮겼다. 1492년(성종23) 병으로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는데, 1494년(성종25) 겨울에 성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병을 무릅쓰고 곡림(哭臨)하다가 슬픔으로 병이 더하여, 1495년(연산군1) 2월에 자택에서 죽으니, 향년이 58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키가 헌칠하고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는 충직하고 신실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너그럽고 인자하고 천성이 순박하였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늘 즐겁게 지냈으며,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촉하는 데에 있어 화기(和氣)가 얼굴에 가득하였으니, 충후(忠厚)한 사람이었다. 나라의 일은 경중(輕重)을 헤아려 정대(正大)하고 공평하게 처리하니, 나라의 주석(柱石)이라는 평을 받았고, 성종의 두터운 신임과 여러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어서 곧 의정(議政)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58세로 죽자 그가 너무 빨리 죽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성종이 왕자와 옹주(翁主)가 많아서 민가에 맡겨서 길렀는데, 왕자와 옹주를 극진히 봉양(奉養)한 자는 대부분 높은 작위(爵位)를 받았다. 성건도 성종의 아들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을 어렸을 적부터 그의 집에서 길렀기 때문에, 성종의 두터운 신임과 높은 작위의 벼슬을 얻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남쪽 해촌리(海村里)의 언덕에 있고,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허백정집(虛白亭集)』 권3)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호조 참의 한전(韓磌)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다. 둘째 형 성준(成俊)의 아들 성경온(成景溫)을 양자로 삼았는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영의정 성준이 교형을 당하자, 당시 공조 정랑이었던 성경온은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