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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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중(徐文重)

서지사항
항목명서문중(徐文重)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34년(인조12)∼1709년(숙종35) = 76세]. 조선 후기 숙종 때 활동한 상신(相臣). 자는 도윤(道潤), 자호(自號)는 몽어정(夢漁亭)이다.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거주지는 서울 회현방(會賢坊)이다. 생부는 남원부사(南原府使) 서정리(徐貞履)이고, 생모 경주이씨(慶州李氏)는 형조 판서 이시발(李時發)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손자이고, 형조 판서 서문유(徐文裕)의 친형이다. 우의정 서경우(徐景雨)의 아들인 관찰사 서원리(徐元履)가 후사가 없어서 양자로 갔다. 양모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영의정 김육(金堉)의 딸이다.

[숙종 전반기 활동]
1657년(효종8) 나이 24세 때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 23년이 지나서, 1680년(숙종6) 나이 47세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에 음보(蔭補)로 여러 말단 관직을 거쳐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을 때 대과에 급제하여, 대간(臺諫)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치지 않고, 바로 종2품 대신(大臣)으로 진출하여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보통 사람과 다른 벼슬길을 걸으면서 당론(黨論)에 휩쓸리지 않고 온건한 중립 노선을 선택하여 숙종 시대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당쟁 싸움에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젊었을 때 과거에 거듭 실패하자, 양부(養父)의 권유로 1673년(현종14) 나이 40세 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보임되었다. 양부의 천거로 종6품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에 올랐으며, 종5품 의금부 도사(都事)를 거쳐 종4품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 1678년(숙종4) 종3품 이천부사(利川府使)를 거쳐, 1680년(숙종6)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재임하다가 그해 가을에 정시(庭試) 문과에 1등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陞品)하였다. 1681년(숙종7)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자, 사람들이 너무 빨리 초승(超陞)한다고 비난하므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8)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이듬해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83년(숙종9)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임명되었고,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선혜청(宣惠廳) · 비변사(備邊司)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임하다가, 나중에는 의금부(義禁府) · 도총관(都摠管)을 겸대하였다.

1685년(숙종11) 변방 백성들이 만주 땅으로 월경(越境)한 사건이 발생하여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양계(兩界) 지방의 관찰사를 불러 조사하게 되었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이하 조정 대신들의 천거를 받은 서문중이 사건의 조사를 담당할 도승지가 되었다. 조사 결과 이것은 조선 후기 함경도와 평안도 백성들이 인삼을 채취하려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갔다가, 여진족의 중국 본토 이주로 공지(空地)가 된 만주의 농토에서 농사를 짓고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청나라 칙사(勅使)와 외교적 담판을 벌여서, 양국 군사가 합동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국경지대를 순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을 <통순회초(通順會哨)>라고 하는데, 만주 이민을 둘러싸고 양국이 합의한 중대한 담판이었다. 이 일이 끝나자, 서문중이 체직하기를 청하니, 유사당상(有司堂上)의 소임만을 전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곧 도승지로 다시 임명되었고 1686년(숙종12) 한성부 좌윤(左尹)을 거쳐 공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양사(兩司)의 대사헌 ·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87년(숙종13) 특별히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희빈장씨(禧嬪張氏)와 손을 잡은 남인이 정권을 잡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지지하던 서인들을 몰아냈는데, 송시열(宋時烈)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때 서문중도 모든 직책을 내어 놓고 금천(衿川)에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남인들은 그가 도성 가까이에 있는 것을 꺼려하여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내보냈다. 그 뒤에 경주부윤(慶州府尹)과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하면서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지냈다.

[숙종 후기 희빈장씨 옥사]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서 희빈장씨와 남인이 쫓겨나고, 인현왕후가 중궁으로 복위되었다. 숙종은 서인들을 불러들이면서 가장 먼저 서문중을 병조 판서에 임명하여 의금부 지사를 겸하게 하고, 희빈장씨의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때 숙종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중전장씨에게 옥새를 거두되 희빈의 옛 작호를 되돌려 주고 세자(世子: 경종)가 희빈에게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禮)를 폐지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도승지 서문중은 숙종의 의중을 간파하고, 이조 참판 박태상(朴泰尙) 등 여러 사람들을 돈녕부(敦寧府)에 모아서 희빈장씨의 거취 문제를 의논할 때 희빈장씨 모자에 대하여 온건론을 폈다. 여기서 서문중은 “중궁의 자리에 있은 지 한분은 9년이고 다른 한분은 6년인데, 한분은 세자 아들이 없고 다른 한분은 세자 아들이 있으니, 장차 어느 분이 중하고 어느 분이 가볍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중전 자리에 인현왕후가 오래 있었으나 왕세자가 있어 중전장씨도 가볍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범허정(泛虛亭) 송광연(宋光淵)은 그 자리에서 크게 격분하여 “장씨를 위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는 일은 그대들만이 하라.” 하였고, 문사랑(問事郞) 김시걸(金時傑)과 지평(持平)정호(鄭澔) 등은 공개적으로 “서문중이 장희빈 옥사를 고의로 너그럽게 봐주려고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 일로 서문중은 사임하고 금천(衿川)으로 나가서 은거하였는데, 소론의 영수 박세채(朴世采)가 서용할 것을 건의하자 숙종이 그를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임명하였다. 서문중은 여러 차례 상소하여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다시 비국(備局)의 추천으로 훈련대장(訓鍊大將)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형조 판서 ·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1696년(숙종22)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고, 의금부 판사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마침내 우의정(右議政)으로 영전하였다. 그때 지평(持平)신임(申銋)과 향인(鄕人) 이현명(李顯命)이 상소하여 서문중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그를 파직하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사직하는 상소를 17차례나 올리니, 숙종이 돈녕부 판사로 전임시켰다.

그해 겨울에 그는 동지사(冬至使)를 겸하여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세자[경종]의 책봉(冊封)을 주청하였다. 항상 그가 세자를 두둔하였으므로 숙종이 일부러 그 책봉을 간청하는 주청사(奏請使)에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부(禮部)에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종번왕(宗藩王)의 예(例)를 인용하면서 책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1697년(숙종23) 봄에 양사(兩司)에서 서문중의 죄를 물어서 귀양 보내도록 청하고, 서문중도 도성 밖에서 대죄하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청죄(請罪)하였으나, 숙종이 다시 돈녕부 판사로 임명하였다. 1699년(숙종25)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고, 65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00년(숙종26)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는데, 여섯 번이나 차자(箚子)를 올려 사양하자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어 내의원(內醫院)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701년 희빈장씨가 인현왕후가 살아 있을 때 신당(神堂)에서 저주하였던 사실이 발각되었는데, 이것을 <무고(巫蠱)의 옥(獄)>이라고 한다. 이때 그는 희빈장씨의 옥사를 너그럽게 처리하여, 앞으로 부자간의 은정(恩情)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희빈장씨가 사사(賜死)되던 날도 영의정 서문중과 좌의정 신완(申琓) 등이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도록 청하였으나, 숙종은 청납(聽納)하지 않았다. 희빈장씨는 남인의 배경이 없어지자, 소론의 동정을 받았으나, 숙종의 미움을 받아서 결국 죽었다. 희빈장씨와 그의 아들 경종은 당쟁의 희생물이 되었던 셈이다. 그해에 그는 호위대장(扈衛大將)이 되었다가, 1702년(숙종28) 다시 영상(領相)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병이 심하여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704년(숙종30)부터 1708년(숙종34)까지 여러 번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의 뜻은 더욱 확고하여 그가 영상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709년(숙종35) 정월 6일 노병으로 회현방(會賢坊)의 사제(私第)에서 죽으니, 향년이 76세였다.

[다양한 저술 활동]
그의 성품은 책을 몹시 좋아하여 젊어서부터 늙도록 하루도 책을 보지 않을 때가 없었고 유독 사서(史書)를 좋아하여 역대의 사적에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 차기문자(箚記文字: 메모하는 글)를 좋아하여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대목이 있으면 바로바로 메모하여 두었는데, 그것이 쌓여서 권질(卷帙)을 이루었다. 비록 한가한 때라도 한 참도 편히 쉴 때가 없었는데, 군읍(郡邑)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도 조금만 여가가 있으면 반드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상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본래 일이 많은 곳이었으나 공사(公事)의 여가에는 날마다 과거 답안지[應擧文] 한 편씩을 지었는데,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논어(論語)』 한 편 씩을 읽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그 실무를 바탕으로 책을 엮었는데,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연해의 형편과 바닷길의 원근과 군읍(郡邑) · 진포(鎭浦)의 요해처와 전함과 수군(水軍) · 보군(步軍)의 정원과 군량 · 병기 등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책으로 엮었는데, 책 이름을 『해방지(海防誌)』라고 붙여서 누구나 참고 열람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다. 형조에 재임할 때에는, 다른 재신들과 함께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 이후의 봉지(奉旨) · 정제(定制) · 주장(奏狀) · 복제(覆題) 등을 모두 수집하여 간단명료하게 편집하여 하나의 판례를 만들어 나라에 바쳤다. 이것이 열성조(列聖朝)의 수교(受敎)를 수록한 『수교집록(受敎輯錄)』인데, 나중에 조선 시대 관리들이 많이 준용(遵用)하였다. 의정부에 있을 때에는 제사(諸司)에 요청하고 팔도에 문의하여 성지(城池) · 전토(田土) · 호구(戶口) · 곡물(穀物) · 전함(戰艦) · 봉수(烽燧) · 진보(鎭堡) · 우역(郵驛)과 각영(各營)의 군졸 등을 모두 수록하여, 하나의 거질(巨帙)의 책으로 만들어 비변사에 비치하고 제목을 『군국총부(軍國摠簿)』라 하여 모든 방면에 참고하게 하였는데,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일목요연하였다. 또 조선 시대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매 항목마다 그 본말을 간추려서 분류 편집한 『조야기문(朝野記聞)』 11권이 있다. 또 『상제례(喪祭禮)』와 『가범(家範)』 1권, 『역대재상연표(歷代宰相年表)』 2권, 『국조대신연표(國朝大臣年表)』 2권, 『병가승산(兵家勝算)』 3권, 『동인시화(東人詩話)』 1권, 그가 저술한 시문집(詩文集) 1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굳세며, 재간과 도량이 크고, 굳은 지조가 있었다. 그는 진기한 물건은 좋아하지 않았고 음식은 가리는 것이 없었으며, 평생 동안 행동을 근신(謹愼)하였는데, 세간의 부귀영화를 뜬구름 같이 여겨서 멀리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전토(田土)를 남에게 빼앗겼다고 하소연하거나,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갔다고 하더라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본래 당론(黨論)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당론에 편파적이란 지목을 받은 사람과는 한 번도 왕래를 하지 않았고, 전후로 상소하여 논란한 글도 백성의 걱정과 나라를 경영하는 일뿐이고 한 마디, 한 글자도 당론에는 미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대간(臺諫)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재상의 반열로 올라갔으므로, 언관(言官)에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경솔하게 남을 천거하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비방이나 칭송 따위에 대하여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비록 좌절을 당하더라도 스스로 기운을 잃고 포기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들어선 지 30여 년 만에 영상(領相)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지위가 더욱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명망은 더욱 두터워졌다. 그는 고립무원의 희빈장씨 모자에 대하여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서인 가운데 강경론을 고집하는 노론과 대립하여, 정치적으로 소론의 온건론을 선택하였다. 그렇지만 사실은 당파를 초월한 중립 노선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 당쟁이 가장 심하였던 숙종 시대였음에도, 그는 귀양살이 한 번 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영상 자리를 지키다가 자기집 정침(正寢)에서 고종명(告終命)할 수 있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관송리(冠松里)에 예장(禮葬)하였다가 뒤에 장단의 백학산(白鶴山) 아래 언덕으로 이장하였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막내 아들의 친구 이진망(李眞望)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 부인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유수(留守) 이후산(李後山)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3남 서종유(徐宗愈)는 군수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조야기문(朝野記聞)』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稿)』
■ 『가정집(稼亭集)』
■ 『경세유표(經世遺表)』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사계전서(沙溪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