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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1년(효종2)∼1707년(숙종33) = 57세]. 조선 중기 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계용(季容)이고, 본관은 달성(達城)인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남원부사(南原府使) 서정리(徐貞履)이고,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형조 판서 이시발(李時發)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손자이고,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의 동생이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의 삼촌이지만, 나이가 비슷하여 어릴 때부터 같이 글공부를 하면서 자랐다.
[숙종 전반기 활동]
1673년(현종14) 식년(式年) 사마시에서 합격하고, 음보(蔭補)로서 빙고(氷庫)별검(別檢)과 군자감 주부(注簿)를 지냈다. 1684년(숙종10) 나이 34세 때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 1685년(숙종11) 사헌부 지평(持平) ·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 수찬(修撰) ·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그때 열성조(列聖朝)의 지장(誌狀)을 고증(考證)하니, 숙종이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1687년(숙종13)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겼고, 강원도(江原道) 지방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가서 수령(守令)들의 치적과 민생들의 병폐를 염탐하고 돌아와서, 민폐를 숙종에게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1688년(숙종14)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종실인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죄를 논하다가 유배되자, 그는 박세채(朴世采)와 함께 청대(請對)하여 남구만을 변명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두 사람 모두 체직되었다. 얼마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희빈장씨(禧嬪張氏)와 손을 잡은 남인이 집권하고, 경종(景宗)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던 서인(西人)들이 쫓겨났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제주도로 유배당할 때 그는 좌부승지로서 송시열을 삭출(削黜)하라는 숙종의 전지(傳旨)를 승정원에서 오랫동안 봉입(捧入)하지 않다가, 도승지(都承旨) 이세백(李世白)과 함께 모두 파직되었다. 그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송시열은 다시 심문을 받기 위해 도로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문유는 벼슬에서 물러나서 한 동안 칩거하다가, 1691년(숙종17)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나갔고, 뒤이어 장연부사(長淵府使)에 임명되었다. 희빈장씨가 득세할 시기에 그는 지방의 수령관을 역임하며 비바람을 피하였다.
[숙종 후반기 활동]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서 희빈장씨가 몰락하였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그도 소환되어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로 옮겼다. 1695년(숙종21)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고, 돈녕부 도정(都正)으로 옮겼다가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 1696년(숙종22)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하였다. 1697년(숙종23) 대사간에 임명되고, 예조 · 이조의 참의를 거쳐, 1701년(숙종27)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의금부 동지사에 제수되고, 공조 · 병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양사(兩司)의 안옥(按獄)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대간이 모두 파직당하였다. 다시 서용되어 1702년(숙종28) 병조 참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1703년(숙종29) 승문원 제조(提調)를 거쳐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고, 내섬시 제조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704년(숙종30) 돈녕부 동지사를 거쳐,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고,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참판을 거쳐, 제용감(濟用監) 제조로 옮겼다. 1706년(숙종32) 형조 판서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 제조를 겸임하였고 예조 판서에 임명되어, 승문원 · 선공감(繕工監)의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되었다.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에 임명되어,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겼다가, 다시 예조 판서가 되어 혜민서(惠民署) 제조를 겸임하였다. 1707년(숙종33) 경연 동지사를 겸임하고,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옮겼다가,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1707년(숙종33) 10월 30일에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나이가 57세였다.
저서로는 『만산유고(晩山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자질과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키가 크고 얼굴이 백옥(白玉)같이 희고 깨끗하였으며, 영특한 기운이 미간(眉間)에 드러났다. 성격은 소탈하고 낙천적이었으나, 마음은 강단성이 있어서 평생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오직 그 형편에 따라서 맡은 바 책무를 다하였는데, 처음에는 그 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처리한 일이 모두 조리에 맞았다. 그의 성품은 천진하고 평탄하고 사리가 명백하였기 때문에 남의 충고나 격려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문아(文雅)가 있고 공정하다는 칭찬이 있었고, 외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자애로운 치적이 있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붕당(朋黨)의 화가 결국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다.” 하고, 자기 집 대문을 닫아걸고 남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는 주량이 약하였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야대(夜對)할 적에 숙종이 궁중 술[法醞]을 내려주자, 그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사양하니, 숙종이 많이 마시지 말고 적당하게 양대로 마시라고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평안도 사람 양현망(楊顯望)을 대관(臺官)으로 의망(擬望)하라 고 하다가 마침내 특채를 하였다. 숙종이 계속해서 북도 사람들을 남도 사람과 아울러 채용하라는 하교를 내리자, 그가 상소하기를, “경전(經傳)에 이르기를, ‘입현무방(立賢無方: 출신 지방을 따지지 말고 어진 인재를 등용함)’이라 하였으나, 지금 오로지 동남쪽 지방 사람들만을 쓰고 있는 것도 진실로 ‘입현무방’하는 도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됨을 묻지도 않고 오로지 서북 지방 사람을 기용할 뜻을 가진다면 이것도 어찌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반대하였다. 1707년(숙종33) 봄에 성홍열[斑疹]이 전국에 크게 유행하니, 그가 여러 의원(醫員)들을 각도에 파견하여 환자를 구료하게 하고 약품을 나눠주었다. 공물 주인(貢物主人)들이 인삼이 품귀하여 약재를 지탱하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하자, 자기 자신이 쓸 인삼까지 갈라서 보태주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금릉리(金陵里)의 언덕에 있는데, 이덕수(李德壽)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서당사재(西堂私載)』 권5 「예조판서 증 좌찬성 서공 묘비명(禮曹判書贈左贊成徐公墓碑銘)」) 첫째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관찰사 이홍적(李弘迪)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한성부 판관(判官) 이상연(李尙淵)의 딸이다.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자 서종옥(徐宗玉)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