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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5(중종10)~1593(선조26) = 79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가(思可), 호는 시우당(時雨堂) · 두일당(逗日堂)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인데, 김식(金湜)의 4촌 동생이다. 목세칭과 김식은 모두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어머니는 의금부 경력(經歷) 조격(趙激)의 딸이다. 도승지를 세 번 역임할 만큼 선조의 신임을 얻어서 사천목씨(泗川睦氏)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49년(명종4)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고, 예조 좌랑으로 옮겨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1550년(명종5) 병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생활하였다. 1553년(명종8) 상복을 벗고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고, 1554년(명종9)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승진되었으며,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옮겼다. 이듬해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1556년(명종11)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중시(重試)에 병과로 급제하니, 나이가 52세였다. 이듬해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되었다. 1558년(명종13)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1559년(명종14)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승진되었다. 1560년(명종15) 승문원 판교(判校)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62년(명종17) 병으로 한직에 있었는데, 당시 윤원형(尹元衡)이 요로에 있으면서 목첨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그는 초연(超然)하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1563년(명종18) 병조와 이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영전되었다가,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20)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윤원형(尹元衡)의 모함을 당하여 좌천된 것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즉위) 선조가 즉위하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선조 초년에 조야(朝野)에서 바야흐로 이상적인 정치를 바라면서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성덕(聖德)을 보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였으므로, 대사간 목첨이 공의(公議)를 가지고 이황을 부르도록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그해 10월 선조가 이황을 명소(命召)하였으나, 안동(安東)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이황은 사양하는 글을 올리고 끝내 오지 않았다. 1568년(선조1)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는 천추사(千秋使)로서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천추사 정사는 목첨이었고, 서장관(書狀官)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였다.
1569년(선조2)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황주목사(黃州牧使)로 나갔다. 1571년(선조4) 공조 참의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승정원에 들어가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가서, 임기를 채우고, 1576년(선조9)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1578년(선조11) 호조 참의로 옮겼다가 다시 도승지로 기용되었다. 1579년(선조12)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세 번째 도승지가 되었고, 특별히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전임되었다. 1582년(선조15)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이조 참판으로 전임되어 의금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583년(선조16) 형조 참판을 거쳐, 1585년(선조18)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總管)을 겸임하였다. 1591년(선조24) 한성부 좌윤(左尹)에 임명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서 기로연(耆老宴)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목첨의 나이가 77세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떠났는데, 목첨은 고령이어서 호종(扈從)할 수가 없었다. 다음해 그는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서 경기도 의병(義旅)을 규합하여 대장이 되고, 그 군사의 명칭을 ‘일의군(一義軍)’이라 하였는데, 조정의 명령으로 거느리던 군사를 추의장(秋義將) 우성전(禹性傳)에게 넘겨주고, 사이길을 따라 행조(行朝)로 가다가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렀다. 마침 조정에서 목첨에게 선릉(宣陵) · 정릉(靖陵) 두 왕릉을 봉심(奉審)하도록 명하였는데, 전쟁 중에 두 왕릉이 파헤쳐졌기 때문이었다. 목첨은 왕릉으로 출발하려고 하였으나, 병이 위독하여, 약을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연안의 불타고 부서진 여관[旅舍]에서 운명하니, 때는 1593년(선조26) 5월 21일이었고, 향년이 79세였다.
[성품과 일화]
목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대범하고 정중하며 겉으로는 온화하고 안으로는 너그러웠고, 나태하거나 거만하지 아니하며 즐겨하거나 노여워함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다. 효도를 다하여 아버지 목세칭을 섬겼는데, 엄중한 스승처럼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셨다. 어버이가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 나머지 서실(書室)의 편액을 ‘두일당(逗日堂)’이라고 하고, 스스로 호(號)로 삼았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선행(善行)을 따르도록 권면하였으며, 언제나 새벽에 일어나 여러 자제들에게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을 큰 소리로 외우게 하고, “마음과 몸을 단속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성질이 좋은 사람은 말이 적고 조급한 사람은 말이 많다. 학문은 망령된 말을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스스로 터득한 진리이고 빈말이 아니었다.
성품은 검소하고 간략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손님이 왔는데, 당하(堂下)에 있는 어린 아이가 입은 옷이 남루하였으므로, 손님이 노복인가 의심스러워 물었더니, 그가 웃으면서 “나의 손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아들 3형제와 손자 5명이 문과에 급제하여 출세하였다. 평소 그가 살던 집은 청파동(靑坡洞)의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그가 퇴청(退廳)하면, 합문(閤門)에 발[簾]을 드리우고 열어두었던 대문을 가렸기 때문에 문밖에는 그를 찾아오는 거마(車馬)가 없었고, 오가는 사람은 친척과 친구에 불과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양주(楊州) 동쪽 금촌리(金村里)의 선영에 있는데, 두 부인이 좌우에 같이 묻혔다. 문하생인 진원군(晉原君) 유근(柳根)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서경집(西坰集)』 권7 「이조 참판 목공 신도비명(吏曹參判睦公神道碑銘)」) 첫째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이보(李寶)의 딸이고 이조 판서 이문형(李文馨)의 누이이다. 둘째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판서 정건(鄭謇)의 딸이다. 자녀는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목수흠(睦守欽)은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고, 차남 목서흠(睦叙欽)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지사를 지냈으며 3남 목장흠(睦長欽)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고, 4남 목대흠(睦大欽)은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참의를 지냈다. 손자 목취선(睦取善) · 목겸선(睦兼善) · 목래선(睦來善) · 목성선(睦性善) · 목행선(睦行善) 등 5명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달(顯達)하였다. 그가 죽은 지 18년 뒤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훈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4남 목대흠은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참여하여 좌찬성에 추증되고 사천군(泗川君)에 봉해졌으며, 3남 목장흠은 익사 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일등에 참여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사천부원군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