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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2(선조5)~1641(인조19) = 70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 목첨(睦詹)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현헌(玄軒) 목세칭(睦世秤)의 손자이고, 경상도관찰사 목성선(睦性善)의 아버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1년(선조24)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다음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1593년(선조26) 아버지 목첨과 큰형 목수흠(睦守欽)이 전쟁 중에 돌아가자,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중형 목서흠(睦叙欽) · 동생 목대흠(睦大欽) · 큰조카 목취선(睦取善)과 함께 네 사람이 한 집에서 공부를 하였다. 8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다하여 1599년(선조32) 정시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 동생과 조카도 모두 6, 7년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중형은 과거에 거듭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하급 관직에 진출하였다가 1610년(광해군2) 나이 40세에 겨우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이 네 사람이 두일당(逗日堂) 목첨의 뒤를 이어서 사천목씨(泗川睦氏)를 일으켜 세운 인물들이다.
과거에 합격하자, 바로 승문원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1601년(선조34)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그때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명망 있는 사류(士類)를 탄핵하려고 하므로, 그가 지평으로서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사람들은 목장흠을 염려하였으나 그는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다. 1603년(선조36) 전라도 암행어사가 되어 수령의 잘잘못을 선조에게 자세히 보고하자, 바로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그때 이조 판서인 기자헌(奇自獻)이 인사를 불공평하게 처리하므로 목장흠이 자주 불가하다고 고집하였고, 또 사사로이 그를 찾아보지 않았으므로 기자헌이 노여워하여 그를 내쫒아서 고성군수(高城郡守)로 좌천되었다. 1605년(선조38)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통례원 상례(相禮)로 옮겼다. 1607년(선조40) 세자시강원에 들어가서 필선(弼善) ·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였고,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종부시(宗簿寺)정(正)으로 옮겼다. 이때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체찰사가 되자, 목장흠을 불러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1608년(선조41) 비로소 청요직에 임명되어,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로 전임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1609년(광해군1)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유희분(柳希奮) · 박승종(朴承宗) 등이 광해군의 심복이 되어서 죄안을 교묘히 꾸며서 죄인들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였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이 국청(鞫廳)에 있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목장흠이 사헌부 집의(執義)로서 참석하여 아무런 계제(階梯)도 없이 성옥(成獄)할 수 없다 하니 유희분 등이 역적을 옹호한다고 즉시 사복시(司僕寺)정(正)으로 내쫓았다. 권력을 잡고 있던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은 목장흠의 명망을 듣고 중간에 사람을 넣어 화해하려고 꾀하였으나, 목장흠이 거절하고 순응하지 않자, 외직인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내보냈다. 1610년(광해군2) 내직으로 들어와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어 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1612년(광해군4)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그때 이이첨(李爾瞻)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한음 이덕형이 차자(箚子)를 올려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이이첨 등은 목장흠이 이덕형의 차자 내용을 윤색(潤色)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청풍군수(淸風郡守)로 내쫓았다. 목장흠의 차남 목행선(睦行善)은 나중에 이덕형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1615년(광해군7) 이이첨 · 유희분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발의하자 정승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려 극력 반대하다가 추방당하였는데, 이이첨 등이 목장흠을 다시 무함하였으나 그가 모친상 중에 있었기 때문에 겨우 그 무고를 모면할 수 있었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치고 서반(西班)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사양하고 대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일절 끊었다. 1617년(광해군9) 백관(百官)들이 폐모하도록 정청(庭請)할 적에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다.
1618년(광해군10) 광해군이 동지사(冬至使)로서 정사(正使)에 황호(黃戹)의 외조부 판서 윤의립(尹毅立)을, 부사에 목장흠을 특별히 임명하여 보냈다. 이들은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다녀오면서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황호는 목장흠의 문하생으로서 나중에 그의 비문을 썼다. 1621년(광해군13) 예조 참의에 임명되어, 직책상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할 때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절목(節目)에 관장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승지(承旨)로 발탁되었으나, 사헌부에서 광해군 시대 인목대비를 폐비할 때 서궁에 유폐시키는 절목(節目)이 예조 참의 목장흠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탄핵하여, 파면되었다. 1627년(인조5)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임명되었으나, 1628년(인조6) 유학(幼學) 임지후(任之後)가 <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의 역모>를 고변하였는데, 이 사건과 관련되어 목장흠은 목서흠과 목기선(睦嗜善) 등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대질 심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1629년(인조7)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남원부사 박정(朴炡)이 호남(湖南) 지방에 일어난 도적무리를 토벌하다가, 밤중에 관사를 습격한 그들에게 부상을 당하였다. 인조가 박정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자, 이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목장흠을 추천하였다. 이에 인조가 그를 남원부사에 임명하고 토포사(討捕使)를 겸임시켰다. 목장흠이 남원에 부임해서 무력을 쓰지 않고 오직 민심을 진정시키고 도적을 타이르는 데 주력하자, 도적의 괴수 백룡(白龍)이 체포되고, 남원의 백성들이 안정을 되찾았다. 인조가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하게 하였으나, 목장흠은 사양하였다.
인조는 목장흠이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여 1631년(인조9)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목장흠이 광해군 시대 예조 참의로 있으면서 서궁(西宮)의 감선절목(減膳節目)을 시행한 잘못에 대해 탄핵하였다. 이렇게 반대하는 자가 많았으나 1633년(인조11)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의 추천을 받아 다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34년(인조12)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내직으로 돌아와서 서반(西班)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扈從)하여 청나라 군사와 용감하게 싸웠다. 도성(都城)으로 돌아온 뒤에 호조 참판에 임명되고,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언제나 인조가 인대(引對)하면, 그가 번번이 건의한 것이 많았는데, 인조가 이것을 모두 받아들였다. 1637년(인조15) 함경도관찰사에 다시 임명되어 변방에 가서 고생하다가 풍토병에 걸렸다. 1640년(인조18)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어 의금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1641년(인조19)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으나 병이 심해져서 사은(謝恩)조차 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28일 서울 본가의 정침(正寢)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70세였다.
[성품과 일화]
목장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격은 강직하였으나, 관대한 덕량이 있어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화기애애하였다. 성품이 깨끗하고 소박한 것을 즐겨하며 분수에 지나친 사치는 엄격하게 배척하여, 거친 의복과 음식을 늙어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 큰 고을과 변방의 큰 지역을 맡아서 다스렸지만 집안에는 저축한 곡식이나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았다. 광해군 시대에는 당시 실권자인 이이첨이 그를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어떤 벼슬자리도 기뻐하지 않고 멀리 자리를 피할 생각만을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금촌리(金村里)의 언덕에 있는데, 문하생 황호(黃戹)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만랑집(漫浪集)』 권9 「목참판묘비명(睦參判墓碑銘)」) 첫째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군자감 주부(主簿) 남위(南瑋)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성주배씨(星州裵氏)는 배흥립(裵興立)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목성선(睦性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차남 목행선(睦行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의를 지냈으며 차녀는 예조 판서 조형(趙珩)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