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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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국(洪柱國)

서지사항
항목명홍주국(洪柱國)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23년(인조1)∼1680년(숙종6) = 58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범옹(泛翁)ㆍ죽리(竹里)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 홍영(洪霙)이고,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영의정 이정귀(李廷龜)의 딸이다. 대사헌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손자이고,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막내 동생이다.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정철의 아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26)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0세였다. 1663년(현종4)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고, 1665년(현종6)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666년(현종7) 삼자함(三字啣)에 임명되어, 이때부터 오랫동안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67년(현종8)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었고, 1668년(현종9)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 · 교리(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1669년(현종10)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효종이 친히 군사를 열병(閱兵)하는 것과 임금이 왕비와 함께 자주 온천에 행차하는 것을 간쟁(諫爭)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이 삭탈(削奪)되었다. 1670년(현종11)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고,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1671년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으로 옮겼다. 같은 해 다시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옮겼다. 1672년(현종13)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1673년(현종14)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이때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674년(현종15)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돌아가자,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의 복제(服制)를 둘러싸고 송시열(宋時烈) · 김수흥(金壽興) ·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은 9개월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였고, 허적(許積) · 윤휴(尹鑴) 등 남인은 1년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이른바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예조에서 고례(古例)에 따라 자의대비가 대공(大功) 9개월 상복을 입도록 청하였으나, 현종은 남인의 기년복으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예조 판서 조형(趙珩), 참판 김익경(金益炅), 참의 홍주국, 정랑 임이도(任以道)는 모두 하옥되어 엄중한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그때 즉위한 숙종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제2차 예송>의 결과, 숙종 초기에는 남인 허적 등이 정권을 잡고, 서인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김수흥은 춘천(春川)으로, 송시열은 덕원(德源)으로 각각 부처(付處)되었다. 1679년(숙종5)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남인들이 실각하자, 홍주국은 다시 기용되어 안악현감(安岳縣監)이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숙종이 특지(特旨)를 내려서 부임하도록 재촉하였다. 현감으로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청(淸)나라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관반사(館伴使)로 나갔다가 병에 걸려, 1680년(숙종6) 3월 6일에 갑자기 사신 공관(公館)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8세였다.

저서로는 『범옹집(泛翁集)』 9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주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청빈(淸貧)함을 좋아하고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아 작은 집에 초라하게 살면서 채소와 쌀겨조차도 제대로 넉넉하게 먹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항상 점잖고 차분하게 절조(節操)를 지키면서 살았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그 관품과 지위가 낮아도 언제나 벼슬을 남에게 미루고 양보하였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형들과 누나들을 마치 부모처럼 의지하고 자랐다. 그러므로 중형(仲兄)이 죽었을 때 지은 애사(哀辭)는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 시(詩)와 사(詞)로써 또래의 친구들을 굴복시켰고, 선진(先進) 대가(大家)의 칭찬을 받았는데, 모두 친조부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과 외조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의발(衣鉢)을 그대로 전수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진사(進士)가 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면서, 홍문관과 세자시강원에도 오래 있었다. 임금을 보도(輔導)하고 일을 논사(論思)하는 것이 반드시 정도(正道)에서 나왔다.

사헌부의 관원으로 있을 때 효종이 친히 무사(武士)들을 점검하고 사열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쟁론하였고, 효종이 자주 왕비와 함께 온천에 행차하므로 대왕대비(大王大妃: 인목대비)를 받드는 것이 소홀하다고 간쟁하였다. 그의 맏형 홍주원(洪柱元)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외동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한 종실 부마였기 때문에 효종의 오해를 사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폄출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번 대각(臺閣)에 의망(擬望)되었으나 효종이 번번이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또 부마 홍주원이 유배된 친구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을 구원하려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는 효종이 부마가 국정에 간여함은 부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홍주국(洪柱國) 형제는 낙정(樂靜) 조석윤과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홍주국은 판서 박장원과 의기(意氣)가 서로 통하여, 시를 지어 주고받으면서 회포를 풀었다. 홍주국의 시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므로, 그가 지은 시는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膾炙)되었다. 그는 전후로 과제(課製)에서 1등으로 뽑힌 것이 16번이나 되었고, 또 일찍이 연달아 세 차례나 1등을 차지하여 특별히 승품(陞品)되었는데, 인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 이러한 은전(恩典)을 받은 사람은 단 네사람 뿐이었는데, 홍주국이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풍양(豐壤) 현창리(縣倉里)에 있는데, 맏형 홍주원의 친구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이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의 딸로 2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만선(洪萬選)은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지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구당집(久堂集)』
■ 『남계집(南溪集)』
■ 『동명집(東溟集)』
■ 『만정당집(晩靜堂集)』
■ 『백호집(白湖集)』
■ 『분애유고(汾厓遺稿)』
■ 『송곡집(松谷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