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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9년(명종4)∼1615년(광해군7) = 67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초명은 홍인상(洪麟祥)이다. 자는 군서(君瑞) · 원례(元禮)이며 호는 모당(慕堂)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홍수(洪脩)이고, 어머니 문경백씨(聞慶白氏)는 습독관(習讀官) 백승수(白承秀)의 딸이다. 홍이상은 홍난상(洪鸞祥) · 홍봉상(洪鳳祥)의 형이다.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73년(선조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78년(선조11) 문묘(文廟) 마당에서 시행한 대책(對策)에서 장원하여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하게 되었다. 이듬해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1세였다. 선조가 그의 글이 과거의 글 같지가 않다고 칭찬하니 재상 노수신(盧守愼)도 따라서 칭찬하였고, 판서 윤두수(尹斗壽)는 그가 문장뿐만 아니라 조행(操行)도 아름다운 선비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선조는 홍이상을 중하게 여겨서 중신으로 발탁하였다. 홍이상은 과거에 합격한 뒤에 예조와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경서(經書)를 교정(校正)하였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이조 정랑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태복시(太僕寺) 정(正)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 · 의정부 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문사랑(問事郞)에 임명되어 우의정 정철(鄭澈)을 도와서 옥사(獄事)를 다스렸고, 곧이어 황해도안무어사(黃海道安撫御史)로 나가 변란 후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돌아와서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가 1591년(선조24)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 참의로 옮겨서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어가(御駕)가 평안도에 이르렀을 때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이때 막내 동생 홍봉상(洪鳳祥)은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임진강변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593년(선조26) 양궁(兩宮)이 정주(定州)에서 만났을 때,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27)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서,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 이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별히 승진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1596년(선조29)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597년(선조30)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형조 참판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는데, 비변사(備邊司) 유사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1599년(선조32)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 1600년(선조33)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임하였다. 1602년(선조35)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에 임면되었다. 이때 영남 유생 문경호(文景虎)가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고 상소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배척하고, 장차 서인을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는데, 그는 힘껏 성혼을 변명하다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좌천되었다. 그는 안동부사로 나가서 『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를 간행하였다. 1605년(선조38)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가,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다. 1607년(선조40)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광해군시대 활동]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609년(광해군1)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4) 대사간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어 춘추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 광해군 시대의 정치가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 벼슬할 뜻이 없어져, 그는 외직(外職)인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유후(留後)로 나갔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하고, 그의 동료들이 체포되어 잇달아 유배되었으나, 그는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선영(先塋)이 있는 고양(高楊)으로 돌아와서, 두 번 다시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1615년(광해군7) 4월에 병이 나자, 고양의 옛집에서 약(藥)을 물리치면서,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데 그걸 마신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임종할 때 평안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작별하기를, “온전한 몸으로 죽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9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춘추가 67세였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는 비문에서, “그는 위태로운 시기에 기미(幾微)를 잘 살펴서 처신하였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모당유고(慕堂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홍이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자상하며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며 소박함을 즐기고 사치하고 화려함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에 대한 우애 또한 깊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데다가 병든 누이동생도 있었는데, 그는 몸소 누이동생의 병을 간호하며 사이사이 두 남동생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두 동생이 간혹 게으름을 피우면 매로 엄하게 경계하였다. 그와 두 동생은 모두 학문을 이룩하고,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나중에 재산을 나눌 때에도 좋은 것들은 동생들에게 주었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다른 사람과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포의(布衣) 때부터 재상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처신하고 행동하는 것이 처음과 똑같았다.
그는 민순(閔純)에게 학문을 배워 유학(儒學)으로 저명하였다. 선조 때에 오랫동안 경연(經筵)에 있었는데, 선조가 강관(講官)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정시(庭試)에서 연달아 장원을 하고 일찍 호당에 뽑혀 문명(文名)이 높았지만 그는 끝내 문한(文翰)으로 자임(自任)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선조가 의정부에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들이 이항복(李恒福) ·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홍이상을 천거하였다. 1592년(선조25) 어가를 수행할 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정치에 관여하는 폐단을 극력 진달하고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조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여러 차례 외직을 자청하여 외방으로 나갔다. 그 사람됨이 단정하고 온아(溫雅)하여 그 의논하는 바가 편벽되지 않았으며, 간혹 조정의 큰 의논을 만나더라도 정도를 견지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난리통에 서적들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홍이상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때에 『소미통감절요(少微通鑑節要)』를 간행하였는데, 매 권마다 권외(卷外)에 별도로 주해(註解)를 몇 쪽씩 덧붙여서 만들었다. 『순암집(順菴集)』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간명하고 책의 편집이 공부하기에 편리하여, 어린아이의 학문을 접하는 초보 과정의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의 고봉(高峯) 아래에 있는데, 사돈인 영의정 이정귀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사집(月沙集)』 권43)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고언(金顧言)의 딸인데, 6남 3녀를 낳았다. 위로 아들 넷은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홍방(洪霶)은 대사간을 지냈고, 차남 홍립(洪雴)은 관찰사를 지냈으며 3남 홍집(洪*)은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냈고, 4남 홍영(洪霙)은 예조 참판을 지냈다. 4남 홍영은 영의정 이정귀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홍영의 장남 홍주원(洪柱元)은 선조의 맏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고, 홍영의 4남 홍주국(洪柱國)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