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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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언충(洪彦忠)

서지사항
항목명홍언충(洪彦忠)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73년(성종4)∼1508년(중종3) = 36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이다. 본관은 부계(缶溪)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함창(咸昌)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홍귀달(洪貴達)이며 어머니 상주김씨(尙州金氏)는 김숙정(金淑貞)의 딸이다. 홍언국(洪彦國)의 형이다.

[갑자사화와 홍언충]
1495년(연산군1)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497년(연산군3)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명되어 1498년(연산군4)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해 질정관(質正官)으로 사신을 따라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 이어 승문원에 들어가 저작(著作) · 박사(博士)를 거쳤고, 이조 좌랑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499년(연산군5) 홍문관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03년(연산군9)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정랑으로 옮겼다. 그해 정조사(正朝使)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 제헌왕후)를 폐위할 때 간여한 모든 신하들이 참혹한 형벌을 받았는데, 그도 모진 고문을 받고 전라도 진안현(鎭安縣)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유배의 명령을 받았을 때 집안사람들이 몸을 피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왕명을 어길 수 없다며 길을 떠났다. 그는 살아서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진안으로 귀양가던 길에 유곡역(幽谷驛)에서 시를 짓기를, “이번 길은 살아서 돌아올 날을 헤아리지 못하겠으니,[此行不料生還日] 세상만사를 유유하게 다만 하늘에 맡길 뿐이로다.[萬事悠悠只付天]” 하였다.(『패관잡기(稗官雜記)』 권4) 그때 연산군은 경기도관찰사 홍귀달에게 손녀딸인 홍언국의 딸을 바치라고 하였다. 홍귀달은 연산군의 청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는 도중에 단천(端川)에서 교형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홍언충은 유배 중에 모친상을 당하고 뒤이어 부친상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홍귀달의 옥사에 연좌되어 진안현에서 잡혀와 온갖 형신(刑訊)을 당하고 거제도(巨濟島)로 이배(移配)되었다. 거제도에서는 막내 동생 홍언국과 같이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홍언국은 병이 심한 형 홍언충을 지성으로 간호하였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함창(咸昌)으로 돌아왔다. 중종이 그를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중종반정> 이후에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던 사람은 홍언충과 남세주(南世周) 두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원래 병약하였는데, 귀양살이하는 동안 병이 심해졌다. 1508년(중종3) 3월 7일 앓던 병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니, 향년이 겨우 36세였다.

문집으로 『우암집(寓菴集)』이 전하는데, 후손이 그 목판본을 보관하고 있다.

[성품과 일화]
홍언충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너그럽고 솔직하여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다. 재주가 있어서 어릴 때 이미 학문에 깊이 침잠하여, 약관의 나이에 학문이 크게 대성였다. 또 문장에 능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그의 문장은 왕양(汪洋)하고 청건(淸健)하여, 사람들이 그가 아버지 홍귀달보다 훌륭하다고 평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예서(隷書)를 잘 썼는데, 당시 대령(大寧)의 정순부(鄭淳夫), 덕수(德水)의 이택지(李擇之), 고양(高陽)의 박중열(朴仲說)과 함께 ‘글씨의 사걸(四傑)’이라 불리었다.

그는 <갑자사화> 때 스스로 자기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지었는데, 이것이 「자만사(自挽辭)」로, 그 문집과 함께 세상에 전한다. 그리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갑자사화> 때 그가 국문을 당하고도 의연했던 모습을 전하고 있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홍언충은 옥에 갇혀서 갖은 고문을 당한 다음 담여(擔輿)에 실려 나오다가 나무 아래에서 잠깐 쉬게 되었다. 이때 홍문관의 옛날 동료 김안로(金安老)가 지나가다가 그의 옷이 피로 물든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서 붉은 옷을 가리키며, “참혹하군요.” 하니, 그가 “이것은 홍문관(弘文館: 洪文官)에 핏물이 든 것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대간에서 홍문관을 탄핵하여 자기가 죄를 받게 되었다는 말인데, 홍문관의 ‘홍(弘)’자와 홍언충의 ‘홍(洪)’은 음이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상주군 무림현(茂林縣) 남도연리(南道淵里)에 있는데, 막내 동생 홍언국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무반(武班) 남손(南蓀)의 딸로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홍망지(洪望之)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서산집(西山集)』
■ 『송재집(松齋集)』
■ 『우암고(寓菴稿)』
■ 『이참봉집(李參奉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