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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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상(洪鳳祥)

서지사항
항목명홍봉상(洪鳳祥)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56년(명종11)∼1592년(선조25) = 37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문서(文瑞)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직(司直)홍수(洪脩)이고, 어머니 문경백씨(聞慶白氏)는 습독(習讀) 백승수(白承秀)의 딸이다. 별제(別提) 홍우전(洪禹甸)의 손자이고,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막내 동생이다.

[선조시대 활동]
1579년(선조1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선조1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 종군하였다. 그는 본래 활쏘기를 좋아하고, 병법을 안다고 자처하였는데, 왜적과 싸울 때 임기(臨機)하여 작전을 세우는 것을 김명원이 보고 더욱 영특하게 여겼다. 그해 5월에 김명원의 군사가 임진강변에 주둔하여 왜적과 대치하고 있었었는데, 그달 중순 즈음 왜적이 복병(伏兵)을 숨기고 일부러 도망가는 척하니, 김명원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추격하려 하였다. 김명원은 홍봉상이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급히 추격하다가 매복한 왜적에게 급습을 당하였다. 당시는 선조의 어가(御駕)가 임진강을 막 건넜을 때이고 그 어가를 홍봉상의 형인 홍이상(洪履祥)이 호종(扈從)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국가의 존망(存亡)이 이번 싸움에서 결정된다.”고 말하고, 자신이 직접 달려가서 싸우려고 하였다. 이에 김명원이 그의 손을 잡고 만류하자 그는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어찌 사생(死生)을 따져서 왜적의 병화(兵禍)를 군부(君父)에게 미치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전선으로 나갔다. 그가 강변 남쪽 언덕에 이르니, 우리 군사들은 이미 전멸하였다. 그는 안색이 변치 않은 채 그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그는 스스로 강물로 뛰어들어 죽으니, 그때가 1592년 5월 18일이었고, 나이는 겨우 37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봉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부모를 섬기는 데에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하면서 몸소 약을 달였는데, 10년을 하루같이 아버지를 보살피고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3형제의 막내였는데, 백형 홍이상(洪履祥) · 중형 홍난상(洪鸞祥)과의 우애가 극진하였다. 그들이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큰형이 동생들을 직접 가르쳤는데, 동생들이 간혹 게으름을 피우면 매를 때리고 격려하였다. 큰형 홍이상은 선조 때 유명한 유학자로 대제학을 지냈다. 홍봉상은 왜란(倭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때부터 사랑채에서 궁검(弓劍)을 어루만지면서, 밤새 한숨을 쉬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집안 사람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피난갈 곳을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원수 김명원이 종사관으로 부르자, 그는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종군하였다. 그는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여 취사(取舍)를 매우 현명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의 천성에서 나온 충의(忠義)의 절개뿐만 아니라, 평소 그가 큰형으로부터 배운 충직(忠直)한 수양(修養)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홍봉상은 어릴 때부터 경사(經史)의 서적을 읽다가 옛사람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대목이 나오면 몇 번씩 다시 읽으면서 비분강개하였는데, 그때마다 큰형은 어린 동생에게 충직함을 일깨워주었다. 홍이상은 동생들에게 문무(文武)를 갖춘 인물이 되도록 권유하였는데,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 “홍봉상은 본래 활쏘기를 좋아하며 병법을 안다고 자처하였는데, 이날 자청하여 전투에 참여했다가 죽었다.”고 기록한 것도 빈 말은 아니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개천리(開天里) 언덕에 있는데, 홍봉상이 전투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의관을 부인의 묘에 묻어서 허장(虛葬)을 지냈다. 외손자 이진(李縝)의 부탁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현종 때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정랑 권응시(權應時)의 딸로 딸만 셋을 낳았는데, 세 딸은 사용(司勇) 이홍헌(李弘憲), 판관(判官)정시혁(鄭時赫), 장령(掌令) 이유양(李有養)에게 출가하였다. 이진의 어머니인 셋째 딸은 성품이 지극하여 친정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서 피를 먹였으며, 그녀의 6남 1녀 중에서 장남 이적(李績)과 5남 이서(李緖)도 어머니의 병에 그 어머니처럼 하였으므로, 한 집안에 세 사람의 정려(旌閭)가 나란히 세워졌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재사초(寄齋史草)』
■ 『난중잡록(亂中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류재집(四留齋集)』
■ 『어우집(於于集)』
■ 『면암집(勉菴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