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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3년(인조11)∼1670년(현종11) = 38세]. 조선 후기 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숙평(叔平), 호는 약헌(藥軒)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이고, 어머니는 선조와 인목왕후(仁穆王后) 사이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이다. 예조 판서 홍만용(洪萬容)의 동생이고,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매제(妹弟)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26) 나이 16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다. 1662년(현종3) 30세에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15년 동안 과거 준비를 하느라 고생하여,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 1664년(현종5)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하였고, 1665년(현종6)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1666년(현종7)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는데, 항상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때 중시(重試)에 합격하고 세자시강원에 들어가 사서(司書) · 문학(文學)으로 승진하였다. 1667년(현종8) 홍문관으로 옮겨 차례로 수찬(修撰) · 부교리(副校理) · 교리(校理)가 되었다. 1669년(현종10) 극선(極選)으로 병조 좌랑과 이조 좌랑이 되었다. 곧 체직되어 사헌부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몸이 쇠약하여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항상 사임하였다. 1670년(현종11) 1월 14일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겨우 38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만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용모는 청백(淸白)하고 준수하며, 성품은 청렴하고 온화하였다. 또 마음가짐은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다. 그는 자상(慈詳)하면서도 굳센 지조가 있었고, 준일(俊逸)하면서도 괴팍한 논의가 없었다. 그래서 “올바른 정신이 있으면서도 순박한 사람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다.”라는 주자(朱子)의 말씀에 거의 가까운 사람이었다. 공주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소 생활하는 것이 담박하여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으나, 항상 논의가 공정하고 뜻이 고결하여 동료들이 추앙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면서부터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게 되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모두 어질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의 문사(文詞)가 아름다워 글을 애송(愛誦)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언젠가 다른 사람이 그의 글을 백여 구절이나 줄줄 외운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가 그것을 듣고서 즉석에서 추록(追錄)하였는데, 글자 하나 빠지거나 틀린 것이 없을 만큼 적어 그의 글솜씨와 함께 뛰어난 기억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저택의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해 놓고 문을 닫고 방안에서 오랫동안 앉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다가,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글을 지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천현리(泉峴里)에 있는데, 두 아들의 부탁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호조 참의 민광훈(閔光勳)의 딸로 2남을 낳으니, 장남은 군수 홍중모(洪重模)이고, 차남은 목사 홍중해(洪重楷)이다. 4대손은 좌의정 홍낙순(洪樂純), 돈녕부 판사 홍낙춘(洪樂春)이고, 5대손은 참판 홍국영(洪國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