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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8년(세종20)∼1504년(연산군10) = 67세]. 조선 전기 세조~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 함허정(涵虛亭)이다.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주거지는 경상도 함창(咸昌)이다. 아버지는 홍효손(洪孝孫)이고, 어머니 안강노씨(安康盧氏)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사재감(司宰監) 홍순(洪淳)의 증손자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다.
[세조 시대 이시애 반란의 평정]
1459년(세조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61년(세조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제3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 삼관(三館)의 관직을 두루 거쳐, 1464년(세조10)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가 되었고 이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設書)가 되었는데, 1466년(세조12) 중시(重試)에 장원을 하자 뽑혀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다. 1467년(세조13) 5월 길주(吉州) 토호(土豪)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켜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道使) 강효문(康孝文)을 죽이고 스스로 절도사라고 자칭하니 함길도 토호들이 앞 다투어 수령을 죽이고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세조가 홍귀달을 평사(評事)로, 허종(許琮)을 절도사로 각각 임명하여 <이시애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는데, 그때 그는 30세였고, 허종은 34세였다.
홍귀달이 함길도평사로 허종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길도로 가는 도중에 함길도관찰사 신면(申㴐: 신숙주 아들)이 반란군에게 살해당하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이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순(康純) 등 제장(諸將)들은 천천히 함길도로 가기를 바랐으나, 두 사람은 소식을 듣고서는 군사를 배나 빨리 진군시켰다. 함길도에서는 1402년(태종2)에 <조사의(趙思義)의 난>, 1453년(단종1)에 <이징옥(李澄玉)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반정부 정서가 강하였는데, 이시애는 이러한 함길도의 반정부 정서를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허종과 홍귀달이 군사를 거느리고 안변에 도착하니, 함길도의 단천(端川) 이북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평안도의 토호도 반기를 들어 정주(定州) 이북이 반란군의 편에 붙은 상황이었다.
이시애는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고 단천으로 내려왔는데, 관군과 반란군 사이에 여러 차례 싸움이 벌어졌으나, 반란군이 우세하여 관군이 밀렸다. 홍귀달은 허종과 거듭 논의하여. 군관 차운혁(車云革) 등을 비밀리에 적진으로 들여보내, 토호들을 설득하여 귀순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홍원(洪原)에서 곧 놓치기는 하였으나 이시애의 동생 이시합(李施合)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그해 8월 북청(北靑) 마흘현(麻訖峴)의 싸움에서 어유소(魚有沼)로 하여금 결사대 수백여 명을 이끌고 비밀히 절벽을 기어 올라가 산 중턱에서 이시애의 본진을 습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시애 형제를 사로잡아 개선(凱旋)하자, 세조가 크게 기뻐하고 초자(超資)하여 공조 정랑에 임명하고, 그에게 장차 문형을 맡길 심산으로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임하게 하였다.
[성종 시대 문형 활동]
1470년(성종1) 예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이듬해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하여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가 되었다. 이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천거되었는데, 대제학(大提學)서거정(徐居正)이 문한(文翰)을 맡을 사람을 외직에 보임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476년(성종7)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478년(성종9) 형조 참의로 옮겼다가 승정원으로 들어가서 우승지(右承旨) ·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하였다. 1479년(성종10) 성종비 윤씨(尹氏: 제헌왕후)가 폐위되려 하자, 홍귀달은 그녀가 원자(元子: 연산군)의 생모(生母)이므로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윤비(尹妃)의 폐출(廢黜)에 반대하다가 한때 투옥되었다. 이때 그가 윤비의 폐출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연산군이 그를 신임하고 중용하였다. 1479년(성종10)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이듬해 중풍(中風)에 걸려 사무를 볼 수가 없었으므로, 경직(京職)으로 옮겨서 병을 치료하였다. 이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겼다. 1481년(성종12)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어 천추절(千秋節) 진하사(進賀使)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484년(성종15)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품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1485년(성종16) 다시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해서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1489년(성종20)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상기(喪期)를 마치고 1491년(성종22)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492년(성종23)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여 마침내 문형(文衡)을 맡게 되었다. 그의 대제학 임명에 대하여, 사신(史臣)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홍귀달은 젊어서부터 저술(著述)에 마음을 두어 시문(詩文)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잘되었다고 생각하였다.”라고 논평하였다. 그해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옮겼다가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대제학을 그대로 겸임하였다.
1493년(성종24) 정조사(正朝使)로서 북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으나, 평소 앓던 풍질(風疾)이 심해져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하였다. 그러자 법사(法司)에서 사신 가기를 기피한다고 탄핵하여 이조 판서에서 파직되었다. 1494년(성종25) 다시 중추부 지사에 기용되어,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연산군 시대 갑자사화의 피화]
1495년(연산군1) 홍귀달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 왕헌신(王獻臣)을 맞이하였다. 1497년(연산군3) 공조 판서로 옮겼다가, 1498년(연산군4)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 ·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항상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여,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한편, 홍귀달은 경연(經筵)에 입시할 때마다 연산군에게 옛날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풍간(風諫)을 하였고, 연산군도 이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부터 형벌을 당하는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을 변명하거나, 직언(直言)을 하다가 죄를 받는 대간(臺諫)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주 상소하였으므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았다. 경연에서 강(講)을 마친 다음에는 대간과 홍문관은 이에 대하여 논하는데, 이때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입시한 신하들은 대개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사체(事體)가 지당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홍귀달은 “신하로서 소회(所懷)가 있으면 반드시 주달(奏達)하여 다 말을 해서 숨기는 바가 없어야 한다. 나는 사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며 그것에 관한 직언을 하였다. 그가 사안에 대해 오랫동안 논계(論啓)하는 것도 연산군은 싫어하였다. 또 ‘10조(條)의 간언(諫言)’을 올리면서 궁중의 비밀스런 일들을 풍간하였는데, 이것이 연산군의 비행을 지적한 것이었으므로, 연산군은 몹시 노여워하였다.
그리하여 1500년(연산군6) 연산군은 홍귀달이 양주목사(楊州牧使)에게 서신을 보내어 사정(私情)을 썼다는 트집을 잡아 경연관 · 대제학 · 참찬 등의 관직을 모두 빼앗고, 한산직(閑散職)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1501년(연산군7)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가 1503년(연산군9) 경기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때 연산군이 장록수(張綠水)의 청을 들어주려고, 신수근(愼守勤)을 통해 경기도 감영의 창고지기[庫直] 자리를 홍귀달에게 부탁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이것도 연산군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은 홍언국(洪彦國)의 딸이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입궐(入闕)시키라고 강요하였는데, 홍귀달은 손녀가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며 대궐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연산군이 홍언국을 잡아다 국문하자, 홍귀달은 자신이 가장이라며 대신 죄를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부자가 서로 구원할 수 없다하고 둘 다 추국하도록 하였다. 홍귀달은 참혹한 형신을 당한 다음, 임금에게 불손하게 간언(諫言)했다는 죄목, 손녀딸을 입궐시키지 않은 죄목 등으로 경원(慶源)으로 유배당하였다. 그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그가 김종직의 문도(門徒)였다는 것도 그의 죄목이 되었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 홍귀달은 단천(端川)에서 교형(絞刑)을 당하였는데, 이때가 1504년(연산군10) 6월 22일이었다. 그 아들 홍언충(洪彦忠) 등 4형제도 모두 해도(海島)로 귀양을 갔는데, 2년 뒤에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유배지에서 풀려 나서 복관(復官)되었으나,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집으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고, 『세조실록(世祖實錄)』 ·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 『역대명감(歷代名鑑)』 등을 편찬하였다.
[성품과 일화]
홍귀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생김새는 헌걸차고, 기량은 넓고 컸다.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서, 평생에 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었으며 남이 자기를 헐뜯는 소리를 들어도 화를 내지 않았으므로, 그의 아량에 감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랏일을 맡아서 큰 일을 할 때에는 말해야 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임금에게 직언(直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한데다가 기질이 특이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집안에 서적이 없어서 언제나 남의 집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었는데, 그 책을 읽고 또 읽어서 내용을 모두 다 외운 다음에야 책을 돌려주니, 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또 친책과(親策科)에 제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때 과거를 주관하던 자가 그의 시권(試券)을 보고 “후일 우리의 의발(衣鉢)을 전할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귀달은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힘써 글을 배우고 아침저녁 반찬 대신으로 소금을 먹으면서 열심히 책을 읽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마침내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문장(文章)은 아름답고 법도가 있었으나, 굳세고 넉넉하고 호탕하였다. 시문(詩文)에도 뛰어나고, 또 서사(敍事)에도 능하여 한 시대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사물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서적(書籍)을 좋아해서 밤낮으로 읽었으나, 싫증내지 않았다. 서울집이 남산(南山) 아래에 있었는데, 남산에 정자를 짓고, ‘허백당(虛白堂)’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날마다 폭건(幅巾)을 쓰고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시를 읊조리니, 마치 세상의 일을 잊은 신선처럼 보였다.
한편 1493년(성종24) 10월 홍귀달이 이조 판서에서 파직되었을 때, 『성종실록』에는 그 기사에 덧붙여 사관(史官)이 이조 판서 재직 시절 홍귀달에 대한 평을 적었는데, “홍귀달이 이조 판서가 되자 어떤 이가 ‘이조는 홍귀달의 재물 창고다.’라는 글씨를 이조의 기둥에 썼다. 또 그의 집에 후문(後門)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북문 학사(北門學士)’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후문을 만들어 사알(私謁)하는 자들을 드나들게 하려 했다고 비난한 말이다. 또 그 문을 ‘통화문(通貨門: 돈이 통하는 문)’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다. 곧 그가 뇌물을 받고 부정 인사를 했다고 평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산군 초기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제자로 살아 남아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관의 평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연산군이 은밀히 감영의 창고지기를 부탁한 것을 단호히 거절한 것을 보면, 그는 남의 부탁을 받고 부정 인사를 행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믿어진다. 명문가와 공신의 후손들이 훈구파(勳舊派)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문형을 오랫동안 맡았으므로, 훈구파의 미움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1504년(연산군10) 그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하여 길을 떠날 때 집안 사람들과 작별하기를, “나는 함창의 가난한 농부로서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성공한 것도 역시 나로부터이고, 실패한 것도 역시 나로부터이니,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하고, 태연하게 길을 떠났다. 유배 가는 도중에 단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조금도 신색(神色)이 변치 않은 채 교형(絞刑)을 당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묘소는 경상도 문경 함녕현(咸寧縣: 영순면) 전촌리(錢村里: 율곡리)의 언덕에 있다. 그가 단천에서 해를 당할 당시에는 미처 시신을 거두지 못하다가, <중종반정> 이후 3년 만에 아들들이 반장(返葬)하여 부인 김씨의 무덤 오른쪽에 묻었다. 그리고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세웠는데, 그의 제자 지족당(知足堂)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그의 막내아들 홍언국이 글씨를 썼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 · 군위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상주김씨(尙州金氏)는 사정(司正) 김숙정(金淑貞)의 딸로, 그가 귀양가자 충격을 받아 그보다 3개월 앞서 돌아갔는데,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홍언필(洪彦弼)은 일찍 죽고, 차자 홍언승(洪彦昇)은 선공감(繕工監)봉사(奉事)를 지냈으며 3자 홍언방(洪彦邦)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直講)을 지냈다. 4자 홍언충(洪彦忠)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고, 5자 홍언국은 생원으로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아들 4형제가 <갑자사화> 때 모두 해도(海島)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 이후에 석방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