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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5년(성종6)∼1525년(중종20) = 51세]. 조선 중기 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순(子醇)이고, 호는 수암(水庵)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인데, 거주지는 성주(星州)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권상(權詳)의 아들이며, 사간원 대사간 권응정(權應挺)의 아버지이다. 이우(李友)의 외손자이고, 여한경(呂漢卿)의 사위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다음, 추성 정난공신(推誠定難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1507년(중종2) 별시(別試)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발탁되었다. 그 뒤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正言) · 헌납(獻納), 형조 정랑, 사헌부 지평(持平), 병조 정랑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언제나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1513년(중종8)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예조 정랑, 내섬시 부정(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중종8)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내섬시(內贍寺)부정(副正)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켰는데, 그는 경상도관찰사 장순손(張順孫)을 따라 가서 이 일을 수행하였다. 권희맹이 기준을 명확하게 만들어 이주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백성들의 불평이 줄었으므로, 장순손이 그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나주목사 시절과 객사]
1516년(중종11)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간 권희맹은, 산신당(山神堂)에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무녀(巫女)들에게 퇴미세(退米稅)를 거두는 등의 방법으로 나주 지방에 성행하던 음사(陰祀)를 금지시켰다. 전라도관찰사 허굉(許硡)이 이 사실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중종이 칭찬하고 옷감 한 벌을 하사하였다. 1519년(중종14) 그가 나주목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가 전라도 능성(綾城)에서 죽음을 당하자, 그는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가서 성심껏 장례를 지내주었다.
1521년(중종16) 명(明)나라에서 태감(太監) 진호(陳浩)를 보내어 동궁(東宮)을 책봉하였다. 진호가 나주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나주목사를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접반사(接伴使)로 삼았는데, 그는 접반사로 진호의 뜻을 들어주고 위로하여 보냈다.
그 뒤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형조 참의로 전직되었다가, 1524년(중종19) 6월에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부임하는 도중에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서 영월군(寧越郡)에서 객사(客死)하게 되니, 향년이 51세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성주(星州) 오도종리(吾道宗里) 수여포(水餘浦)에 있는데, 홍섬(洪暹)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인재집(忍齋集)』 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