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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7년(명종2)∼1624년(인조2) = 78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열(思悅)이고, 호는 남악(南岳)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상(權常)의 아들이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권황(權愰)의 아우이며 예조 판서 권협(權悏)의 형이다. 나운걸(羅云傑)의 외손자이고 이영서(李榮緖)의 사위이다.
[선조 후기의 활동]
1597년(선조30)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서 마침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1599년(선조32) 병조 참의 · 예조 참의 등을 거쳐서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진하사(陳賀使)가 되어 중국 북경(北京)을 다녀와서, 병을 핑계로 도승지에서 물러났다. 사림파(士林派)에서 그가 아첨을 잘한다고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1602년(선조35) 대사간에 임명되었을 때 성혼(成渾) 계열의 산림학파(山林學派)가 대두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중국 북경(北京)을 다녀와서, 호조 참판 · 형조 참판 · 예조 참판을 역임하고, 한성부좌윤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 충청도관찰사와 강화(江華) · 금산(錦山) · 광주(廣州) 3고을의 목민관(牧民官)을 지냈다. 1607년(선조40) 선조는 병이 깊어지자, 그를 다시 도승지로 불러들여 약방(藥房) 부제조(副提調)를 맡겼다. 그는 허준(許浚) 같은 명의(名醫)를 동원하여 선조의 병을 구료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으나, 아무런 보람도 없이 선조는 죽고 말았다. 권희가 선조 후기에 여러 번 도승지를 맡은 데다가 임종 전까지 도승지를 맡았다는 것에서, 그는 선조가 가장 신임하는 도승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인조 시대 원로 우대]
1608년(광해군즉위) 광해군은 즉위한 다음 권희를 중추원 동지사에 임명하여 원로대신으로 우대하였다. 1618년(광해군10) 원로 신하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는 <폐모론(廢母論)>을 주청하는 데에 앞장섰다. 인조도 그를 우대하여 1624년(인조2) 임진왜란 때 종묘의 신주(神主)를 호위한 공로를 포상하여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켰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삼정리(三井里)에 있으며,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호성(扈聖) 선무(宣武) 원종공신(願從功臣)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