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43년(중종38)∼1641년(인조19) = 99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영(思瑩)이고, 호는 치암(恥庵)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권상(權常)의 아들이고, 도승지(都承旨)권희(權憘)와 예조 판서 권협(權悏)의 형이다. 나운걸(羅云傑)의 외손자이고, 이천린(李天麟)의 사위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로서 백수(白壽)를 누린 유명한 인물이다.
[선조 시대 활동]
선조 초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서 금오랑(金吾郞)에 임용되었다가, 위솔(衛率)로 승진하였다.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형조 좌랑 · 호조 좌랑을 거쳐 호조 정랑이 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에 이르렀다. 외방으로 나가 1596년(선조29) 거창현감(居昌縣監)을, 1599년 한산군수(韓山郡守)를, 1601년 순창군수(淳昌郡守)를, 1604년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역임하였다. 마지막으로 마전현령(麻田縣令)을 지낼 때에는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내어 현명한 수령관으로 소문이 났으며, 또 청백리로 이름이 났다. 광해군(光海君) 시대 혼란기를 맞아 세상의 일과 단절하고 아우 권희 · 권협과 같이 아침저녁으로 만나 담소(談笑)하면서 매우 즐겁게 살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나이가 이미 80세였으나,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으며, 1640년(인조18)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로 승진하였다. 인조 시대 여러 원로 재상들이 모여서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그의 나이가 가장 많았으나 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려서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1641년(인조19) 10월 하찮은 병에 걸려서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 달이 없었는데도 이상한 광채가 환하게 집안 정원에서 일어났는데, 며칠간 계속되다가 사라졌다. 그가 향년 99세로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모두 ‘인간 신선’이 떠났다며, 하늘을 보고 “2, 3개월만 더 살게 하였더라면 1백 세가 찼을 터인데, 왜 하늘은 매우 많은 것을 주고도 아주 적은 것을 주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원망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통진(通津) 명월산(明月山)에 있으며, 이서우(李瑞雨)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사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