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68년(선조1)∼1638년(인조16) = 71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중(士重)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유학자 권결(權潔)의 아들이고, 권영(權坽) · 권우(權堣)의 아버지이다. 김사근(金思謹)의 외손자이고 안사흠(安士欽)의 사위이다.
[광해군 시대의 활동]
44세이던 1611년(광해군3)에 과거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한림(翰林)의 후보자로 추천되었는데,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자기편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한림의 추천자 명단에서 삭제해버렸다. 1618년(광해군10)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 이이첨 등이 백관들에게 대궐의 뜰에 나가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요청하는 정청(庭請)을 강요했으나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뒤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광해군 말엽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평안도 지방이 소란할 때에 평안도독운사(平安道督運使)의 종사관이 되어 서북 변경으로 나갔다. 이후 시사(時事)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곧바로 정언(正言)에 발탁되었다. 1624년(인조2)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필선(弼善) · 사간(司諫) · 집의(執義) · 사예(司藝) · 사성(司成)을 거쳐, 군자감(軍資監) · 상의원(尙衣院) · 군기시(軍器寺) · 종부시(宗簿寺) · 사복시(司僕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1626년(인조4)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길주목사(吉州牧使)로 나가서 북방 지방을 다스렸다. 1629년(인조7)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호조 참의 · 형조 참의를 거쳐, 해주목사(海州牧使) ·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1632년(인조10)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14) 아산(牙山)의 농장으로 물러가서 은거하다가, 1638년(인조16) 향년 71세로 돌아갔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천점(泉岾) 동쪽 길경촌(桔梗村)에 있으며, 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