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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3년(연산군9)∼1578년(선조11) = 76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유(景由)이고, 호는 쌍취헌(雙翠軒)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강화부사(江華府使) 권적(權勣)의 아들이며, 권율(權慄) · 권순(權恂)의 아버지이다. 또 안탁(安擢)의 외손자이고, 조승현(曺承睍)의 사위이다.
1550년(명종5)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1554년(명종9)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경상도관찰사 ·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56년(명종11) 명종이 직접 형조 판서로 발탁하여, 중추부 지사 · 병조 판서 · 형조 판서, 1562년(명종17)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임명하였다. 1566년(명종21) 세력가 병조 판서 윤원형(尹元衡)이 죄를 얻어 물러나자,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으로 발탁되었다. 1567년(선조즉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고 1571년(선조4)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선조 초년에 수상으로서 6년 동안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1573년(선조6) 병으로 사직하니, 돈녕부 영사에 임명하였다.
[묘소와 사평]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에 있으며,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중망(衆望)이 있었다. 비록 출중한 재능은 없었으나 청렴하게 법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를 허물하지 못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복상(福相)’이라고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