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41년(중종36)∼1587년(선조20) = 47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형숙(亨叔)이고, 호는 송학(松鶴)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구성부사(龜城府使) 권중신(權仲愼)의 증손자이며 권상(權鏛)의 아들이다. 성복(成復)의 외손자이고 홍봉상(洪鳳祥)의 장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8년(선조11) 이조에서 서용할 만한 젊은 인재로서 정구(鄭逑) · 남치리(南致利) 등 9명을 뽑아서 6품의 관직을 임명할 때, 9현(九賢)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1581년(선조14) 천거를 받아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에 임명되었고, 직무에 부지런하다고 하여, 다음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발탁되었다. 그 뒤에 공조 좌랑 ·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나갔다.
1584년(선조17) 군위현감으로 재직 중에 그와 절친한 지례현감(知禮縣監) 김첨(金瞻)이 일부러 관물(官物)을 몰래 가지고 안동으로 돌아가자, 그는 술기운에 장난삼아 “관가에 도적이 들었다.”는 통문을 주변 고을에 보냈다가, 문제가 커져서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양구현감(楊口縣監)에 보임되었다가, 고향 김천으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과 성품]
묘소는 경상도 김천 금릉(金陵)에 있다. 그는 평생토록 심사(心事)가 소연(蕭然)하여, 속세를 벗어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 호를 송학(松鶴)으로 일컬었다. 또한, 시와 술에다 흥을 붙이고 가정의 일은 생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내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최정수(崔貞秀)의 딸로 1남 4녀를 두었다. 사위 홍봉상은 <임진왜란> 중에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