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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7년(중종32)∼1599년(선조32) = 63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명장. 자는 언신(彦愼)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 · 모악(暮嶽)이다. 본관은 안동인데, 의정부 영의정(領議政)권철(權轍)의 아들이고, 권순(權恂)의 아우이다. 조승현(曺承睍)의 외손자이고,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선조 시대 문관 활동]
46세이던 1582년(선조15) 식년 문과에 겨우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 저작(著作) · 박사(博士)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과 예조 좌랑 · 호조 정랑을 역임하고,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 1591년(선조24)에 다시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서, 1592년(선조25)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로 발탁되었다. 남원(南原)에서 군사 약 1천여 명을 모은 권율은 왜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였다. 도중에 금산(錦山)에서 전라도를 침입하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 군사와 접전을 벌였는데, 비록 아군의 많은 희생이 따르기는 하였지만, 왜군의 침입을 일단 저지하여, 전라도 지방을 보존할 수 있었다. 체찰사 정철(鄭澈)은 전라도를 지키고, 북상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행재소(行在所)에서 경기 · 충청 · 전라의 의병을 권율의 부대에 소속시키고, 빨리 북상하여 서울을 수복(收復)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다. 권율은 약 1만여 명의 관군과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수원(水原)의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였다. 서울 도성을 지키던 왜군의 사령관 우키다[宇喜多秀家]는 독성산성에 주둔한 권율의 군사를 산성 밖으로 유인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양군이 서로 대치하여 오랫동안 지구전을 벌이던 가운데 권율은 비밀리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목책을 설치하고, 1593년(선조26) 2월 1일 행주에서 왜군을 맞아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大捷)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행재소에서 권율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키고, 3도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하였으며 영남(嶺南) 지방에 주둔하여 왜군과 싸우도록 하였다. 그때 행재소의 병조 판서는 그의 사위 이항복(李恒福)이었다. 권율은 그해 겨울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다. 1596년(선조29) 수자리를 이탈한 전주 사람을 처형한 사건이 문제가 되어 해직되었으나, 곧 한성판윤(漢城判尹)에 다시 기용되었다. 호조 판서 · 의금부 지사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을 겸직하였다.
[정유재란 때 활동]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왜적의 북상(北上)을 막기 위해서 명(明)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왜군과 싸웠다. 일본의 가토[加藤淸正]는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해변에 도산성(島山城)을 신축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도원수 권율은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새재(鳥嶺)을 넘어 울산으로 가서 도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때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총병(總兵) 마귀(麻貴)도 4만 5천 명의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함께 싸웠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도산성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성은 무너지지 않은 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598년(선조31) 1월 일본 구로다[黑田長政]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겨울철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면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포위를 풀고 경주(慶州)로 퇴각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이 권율에게 잘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599년(선조32) 권율은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강화로 돌아가서 63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무덤과 추모]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에 있는데, 신흠(申欽)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1604년(선조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훈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1841년 행주산성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하고 제향하였다.
첫째 부인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조휘원(曺輝遠)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박세형(朴世炯)의 딸이다. 외동딸은 이항복에게 출가하였고, 형 권순(權恂)의 아들 권익경(權益慶)을 양자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