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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3년(공민왕12)∼1419년(세종1) = 57세].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문신 · 유학자. 초명은 권원(權遠)인데, 자는 중려(仲慮) · 여보(慮甫)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본관은 안동인데, 고려 좌정승(左政丞) 권희(權僖)의 막내 아들이며, 권근(權近)의 아우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의 스승이다.
[여말 선초의 활동]
23세이던 1385년(공민왕12)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禑王) 때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 · 밀직사(密直司) 당후관(堂後官) · 장흥고(長興庫) 사(使) 등에 임명되었다. 창왕(昌王) 때 군기시(軍器寺)주부(主簿)를 거쳐 공양왕(恭讓王) 때 액정국(掖庭局) 내알자감(內謁者監) · 전의시(典儀寺) 주부(主簿) · 예조 좌랑 ·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권근이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에 협력하면서, 권우는 태조 때 군자감(軍資監) 승(丞) · 광주 판관(廣州判官) 등에 임명되었다. 이어 정종 때는 사헌부(司憲府)잡단(雜端) · 성균관 직강(直講) 등에 임명되었다. 셋째형 권근과 정치적 부침(浮沈)을 함께 하였다.
[태종 시대 활동]
1402년(태종2)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에 임명되어, 집현전 지제교(知製敎) · 예문관 응교(應敎) 등을 거쳐, 1404년(태종4) 사헌부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1408년(태종8)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어, 사간원 우사간(右司諫)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직하다가, 1409년 권근이 죽고 난 뒤에 1411년(태종11)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412년(태종12) 예조 우참의 · 세자 우보덕(右輔德)이 되었다가, 다음해 예조 좌참의 · 세자 좌보덕이 되어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가르쳤다. 1414년(태종14) 형조 참의를 거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는데, 이때에 전시(殿試)의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정인지 등 33명을 뽑았다.
1415년(태종15)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임명되었고, 1416년(태종16) 태종 왕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민무휼(閔無恤) · 민무질(閔無疾)을 자진(自盡)하도록 독촉한 혐의로 하옥되었으나, 태종이 곧 석방시켜서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하였다. 1418년(태종18) 양녕대군이 폐출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승문원(承文院) 판사(判使)로서 세자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어, 세종을 가르쳤다.
시문에 능하고, 성리학의 이론에 정통하였는데, 그의 문하에서 정인지 · 안지(安止) 등 세종 시대의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저서로는『매헌집(梅軒集)』 6권이 있다.
[사후 무덤과 행장]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풍양(豊壤) 봉곡(蜂谷)에 있고, 권람(權擥)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