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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1년(인조19)∼1721년(경종1) = 81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유학자.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 한수재(寒水齋)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청풍(淸風)이다. 권격(權格)의 아들이며 좌참찬 권상유(權尙游)의 형이고, 이초로(李楚老)의 외손자이다.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1689년(숙종24) 특별히 호조 참의로 승진하였다가 이조 참의로 옮겼는데, 찬선(贊善) · 좨주(祭酒)를 겸임하였다. 1703년(숙종29) 호조 참판을 거쳐서, 대사헌(大司憲) · 이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712년(숙종38) 특별히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전직되었다. 1716년(숙종42) 좌찬성을 거쳐서, 1717년(숙종42) 우의정과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로 『한수재집(寒水齋集)』 · 『삼서집의(三書輯疑)』가 있다.
[스승 송시열과의 관계]
진사가 되고 난 다음에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던 중에, 1666년(현종7) 서인(西人)의 태두(泰斗)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고 소청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1674년(숙종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렬왕후)의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南人)이 치열한 당쟁(黨爭)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는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고향 청풍으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이 제주(濟州)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그는 제주도로 달려가서 스승 송시열의 의복과 서적 등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 해에 송시열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井邑)에서 사약(死藥)을 받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셨는데, 송시열은 죽음에 임하여 그의 손을 잡고 은밀히 뒷일을 부탁하였다. 스승이 남긴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명(明)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신주를 모셨고, 대보단(大報壇)을 쌓아서 명나라의 마지막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송시열과 권상하는 여진족이 세운 청(淸)나라가 명(明)나라의 정통성을 결코 계승할 수 없다고 보았다.
송시열이 수제자 윤증(尹拯)과 서로 절교하면서,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분열하였고, 송시열은 후사(後事)을 부탁할 만한 제자를 잃었다. 그런데, 제자 중에 권상하가 급속하게 부상하자, 송시열은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공자가 죽은 다음에 유자(有子)가 그 자리를 이은 것처럼, 송시열이 죽은 다음에 그 문도(門徒)들이 그를 추앙하고 따랐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도 그를 훌륭한 유학자로 대접하여, 여러 번 초청하고 좌의정에 임명하기까지 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충주(忠州) 동곡(東谷)에 있으며,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12) 충청도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