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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8년(중종3)∼1589년(선조22) = 82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길재(吉載)이고, 호는 남강(南岡)이다. 본관은 안동인데, 거주지는 서울이다. 권진(權振)의 아들이며 신회(申澮)의 외손자이고 선조(宣祖)의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梯男)의 외조부이다.
[음직(蔭職)과 노인직(老人職)]
1528년(중종23)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문소전(文昭殿)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529년(중종24) 여자 종 석비(石非)를 구타하여 죽였다고 고소를 당하여 관직에서 쫓겨나서, 20여 년 동안 한가하게 지냈다. 1555년(명종10) 직장(直長)에 임명되어, 1565년(명종20)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거쳐서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으로 옮겼다. 이윽고 사옹원(司甕院) 주부(主簿)로 전직되었다가, 운봉현감(雲峯縣監)으로 나갔는데, 재직 중 부지런하고 청렴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이어서 동부주부(東部主簿), 장례원(掌隸院) 사평(司評), 용강현령(龍岡縣令), 사옹원 판관(判官), 예빈시(禮賓寺) 판관,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 광흥창(廣興倉)수(守), 풍저창(豊儲倉) 수, 전설사(典設司) 수, 예빈시 부정(副正) 등을 거치면서 부임한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1583년(선조16) 선공감(繕工監) 정에 이르렀는데, 이 해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또 1587년(선조20) 80세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
[무덤과 제향]
1589(선조22)년 82세로 사망하였는데, 묘소는 통진현(通津縣) 선영(先塋)에 있으며,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청주의 백록서원(白鹿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