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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8년(성종9)∼1548년(명종3) = 71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허(仲虛)이고, 호는 충재(冲齋) 또는 훤정(萱亭) ·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권사빈(權士彬)의 아들이다.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당(尹塘)의 딸로 성종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근친이었다.
[중종 시대 활동]
30세이던 1507년(중종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거쳐서, 사간원 정언(正言) · 예조 좌랑 ·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중종8)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서, 이듬해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얼마 안 되어 호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1517년(중종12) 장령(掌令)으로 소환되어,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전직되었다. 1518년(중종13)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임금이 친히 임명한 것이다. 그 뒤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1518년(중종13)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때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여, 사림파(士林派)와 훈구파(勳舊派)가 대립하자, 중간에서 이를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519년(중종14)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중추부(中樞府)를 거쳐서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그런데, 그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숙청되자, 사림파인 권벌도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15년 동안 고향 안동에서 지내다가, 1533년(중종28)에 복직되어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승진하였다. 1539년(중종34) 중추부 지사(知事)로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을 청하는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돌아오니, 중종이 기뻐하며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승진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1540년(중종35) 병조 판서를 거쳐서,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올랐으며, 또 1541년(중종36) 예조 판서를 거쳐서, 다음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중종 시대 권벌은 조광조 · 김정국(金正國) 등의 기호(畿湖) 사림파와 손을 잡고 개혁정치를 추진한 영남(嶺南)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다.
[인종~명종 교체 시기 활동]
1545년(명종즉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병조 판서를 맡았으며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다. 그 해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서 명종의 외숙 윤원형(尹元衡) 일파, 이른바 소윤(小尹) 일파가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 일파, 곧 대윤(大尹)을 조정에서 몰아내었다. 이때 소윤 일파인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 등이 권벌을 사림파라고 배척하여 전라도 구례(求禮)로 유배시켰다. 그 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유배지가 평안도 태천(泰川), 삭주(朔州)로 바뀌었다. 1548년(명종3) 3월 26일에 변방의 유배지에서 쓸쓸이 돌아갔는데, 향년 71세였다. 저서로는 『충재집(冲齋集)』 9권 5책이 남아 있다.
[무덤과 신원 제향]
묘소는 경상도 봉화(奉化) 유곡산(酉谷山)에 있고,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1567년(선조즉위) 신원(伸寃)되었고, 1570년(선조3) 시호를 충정(忠定)이라 하였다. 1588년(선조21)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68년(선조1) 좌의정에 추증되었다가 1591년(선조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