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자료문의 :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30-8765
[총론]
[1610년(광해군2)∼1666년(현종7) = 57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 의 무신이며, 척신(戚臣). 자는 응정(應貞)이다. 도승지 권희(權憘)의 손자이고 선조와 온빈한씨(溫嬪韓氏) 딸인 정화옹주(貞和翁主)의 남편이다. 어머니는 조단(趙端)의 딸이다.
[인조 시대 활동]
21세이던 1630년(인조8) 선조의 딸 정화옹주와 결혼하고, 이듬해 동창위(東昌尉)에 봉해졌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 가는 어가(御駕)를 수행한 공로로 자의대부(資議大夫)로 승진하고, 곧 금군청(禁軍廳)의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1631년(인조9)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의 말을 하사하였는데, 그는 하사한 말이 좋지 않다고 하여 담당 관리를 매질하였다가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았다. 1666년(현종7) 정월 세상을 떠나니, 향년 57세였다.
[무덤과 성품]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어등(於登) 관곡(寬谷)에 있는데, 외가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선영이다. 허목(許穆)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25) 외가의 제사를 받들다가 외가의 선산(先山)에 묻혔는데, 그도 후손이 없어 형 권대유(權大有)의 아들 권덕휘(權德徽)를 양자로 삼았다.
성품이 충실하고 몸을 조심하였으며 검소한 생활을 좋아하였다. 남과 사귈 때에는 겸손하게 대했고, 자기가 존귀(尊貴)하다고 자처(自處)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