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95년(선조28)∼1645년(인조23) = 51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척신(戚臣). 자는 홍보(弘輔)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길창군(吉昌君) 예조 판서 권협(權悏)의 손자이고, 선조와 정빈민씨(靜嬪閔氏) 딸인 정선옹주(貞善翁主)의 남편이다.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정필(李廷弼)의 딸로,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이다.
[선조의 부마]
선조 말년에 10여 세의 어린 나이로 정선옹주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어, 길성위(吉城尉)가 되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서예(書藝)에 뛰어나서, 여러 번 궁중으로 불려가 선조 앞에서 글을 썼는데, 임금이 칭찬해 마지않고 번번이 상을 내렸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2)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공주(公州)의 공산성(公山城)으로 피난 갔는데, 권대임은 그 때 수행하였던 공로로 봉헌대부(奉憲大夫)로 승진하였다. 1635년(인조13)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는데, 이는 아버지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의 3년상을 마치자,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적손(嫡孫)이라고 하여 봉군(封君)을 세습한 것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한양(漢陽)에 침입한 청(淸)나라 군사를 피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 가는 어가(御駕)를 수행하였던 공로로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1639년(인조17)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는데, 행장에 든 재화(財貨)를 몽땅 털어서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돌아오지 못하던 노약자(老弱者)들을 속환(贖還)하여 돌아왔다. 1645년(인조23) 10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1세였다.
[무덤과 사후 추모]
묘소는 경기도 부평(富平) 수탄(水呑)에 있는데, 21세에 죽은 정선옹주와 합장하였으며,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18) 사후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하고, 정1품 유록대부(綏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