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38년(중종33)∼1592년(선조25) = 55세]. 조선 중기 명종 · 선조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택중(擇仲)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권덕유(權德裕)의 아들이며 이조 판서 권극례(權克禮)의 동생이다. 또 조계상(曺繼商)의 외손이고, 이이수(李頤壽)사위이며 좌의정(左議政) 이정귀(李廷龜)의 장인이다.
[명종 시대 활동]
30세이던 1567년(명종22)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다. 명종이 돌아가고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할 때, 예문관 봉교(奉敎)로서 춘추관의 기주관(記註官)이 되었다. 이때, 형 권극례(權克禮)는 편찬관이 되어, 형제가 나란히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89년(선조22)에 대사헌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91년(선조24) 형조 참판 및 경연 동지사 · 예조 판서가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비변사(備邊司)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어, 침식을 잊고 어려운 국사에 매달리다가 병을 얻어 사직했다. 전쟁 중에 국세가 날로 위급해가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한 채 피를 토하고 운명하였다.
[무덤과 공적]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소는 임진왜란 중에 사위 이정귀가 가까운 언덕에 매장하였다가 왜적에게 도굴당하였다. 그 뒤에 시신을 거두어 경기도 양주(楊州) 천천리(泉川里)에 장례를 지냈는데, 사위 이정귀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표문(表文)과 책문(策文)에 뛰어나서, 중국 명(明)나라와 왕래하던 외교 문서를 많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