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601년(선조34)].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숙정(叔正), 호는 남애(南崖)다. 본관은 상주(尙州)인데, 관찰사 박세후(朴世煦)의 아들이고, 수찬(修撰)안처선(安處善)의 외손자다. 형은 박충은(朴忠誾)이고, 아우는 박충렴(朴忠廉)이다.
[선조 시대 활동]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584년(선조17)에 호조 정랑이 되었고, 1589년(선조22) 재령군수(載寧郡守)로 있을 때 이축(李軸)· 한응인(韓應寅) 등과 함께 정여립(鄭汝立)의 모역(謀逆)을 고변(告變)하였다. 그 공으로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1590년(선조23)에 호조 판서가 되었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검사(巡檢使)가 되어, 국내 여러 성(城)의 수축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군하는 왜적에 대비하였으나, 왜적의 군사와 싸우다가 도망치고 황당무근한 말을 퍼뜨렸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영남· 호남 지방에 파견되어 군량미 조달을 담당하다가, 1594년(선조27)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구호에 필요한 쌀· 콩· 팥 등을 조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원하였다. 1597년(선조30) 순검사· 선공감(繕工監)제조(提調)를 역임하였다. 1599년(선조32) 윤4월에는 충훈부(忠勳府)의 곡식을 사용(私用)하였다고 하여 유사(有司) 당상관(堂上官)에서 체직되었으며, 1600년(선조33) 남이공(南以恭) 등 남인(南人)들의 파당 행위의 폐해를 상소하였다가, 집권한 남인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1601년(선조34) 5월 11일 병으로 죽었다.
[성품과 사평]
『선조실록(宣祖實錄)』에서는, 그가 “젊어서부터 재덕(才德)이 부족하였고 늙어서도 명성이 없었다. 요행으로 공을 세워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나, 사치가 끝이 없어 당시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그러나 일을 잘 수습한다는 명망이 있기는 하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흑현리(黑峴里) 천마산(天磨山) 아래 낙성곡(洛城谷)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