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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7년(성종18)~1554년(명종9) = 6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에 활동한 문신.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 자는 경번(景蕃),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서울 출신이다.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박의손(朴義孫)의 증손자이고, 부사(府使) 이관식(李寬植)의 외손자이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년이 지나서 1531년(중종26)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5세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고, 이듬해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1536년(중종 31) 예조 좌랑에 임용되고, 이듬해 예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가, 함경도(咸鏡道) 좌막(佐幕)으로 나갔다. 1538년(중종33)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을 거쳐 중추부(中樞府)경력(經歷)이 되었다가, 마전군수(麻田郡守)로 나가서 고을을 잘 다스렸다. 1544년(중종39) 승문원(承文院) 참교(參校)가 되고, 이듬해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을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는데,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 1548년(명종3) 내자시(內資寺)정(正)에 임명되고 내섬시(內贍寺) 정, 군자감(軍資監) 정을 역임하고 벼슬을 사임하였다. 1554년(명종9)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 68세였다.
[동몽선습의 저작]
조선 후기 어린이들은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끝내면 『동몽선습』을 배웠다. 『동몽선습』의 저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요체(要諦)를 간결하게 서술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제왕(帝王)의 세계(世系)를 수록하여, 『소학(小學)』이나 『통감(通鑑)』을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편찬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동몽선습의 저자를 박세무로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견한잡록(遣閑雜錄)』을 보면,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동몽선습』이라는 책이 있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주장하므로,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또 『순암집(順菴集)』을 보면, “『동몽선습』은 중종(中宗) 때 참판(參判)을 지낸 함양(咸陽)의 박세무가 지은 것이다.” 하였다.
『동몽선습』은 편찬된 지 2백년이 지나는 동안 전국의 학당과 서당에서 아동 교재로 널리 보급되어, 아동 교과서로서 『천자문』과 함께 통용되었다. 그래서 영조(英祖)는 1742년(영조18) 6월 교서관[芸館]에 『동몽선습』을 인쇄하여 바치라고 명하였다. 영조는 그 책이 조리가 있어 어린이들이 처음 배우는 데에 요긴하다고 생각하여, 친히 서문(序文)을 써서 간행하게 하였다. 이때 한문으로 쓴 원본과 숙종(肅宗) 때 언해본(諺解本)을 아울러 인쇄하고 장황(粧潢: 비단으로 표지를 싸는 것)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세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영민(穎敏)하고 총명하였다. 성품이 평온하고 고요하며, 산업을 경영하지 않고 시임(時任) 대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외모를 꾸미는 일이 거의 없고,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였다. 박세무가 급제하기 전에 충청도 괴산의 촌가(村家)에 머물면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풍속이 음사(淫祀)에 빠져 성황신(城隍神)이라는 것을 받들고 두루 굿을 행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심하게 입혔다. 굿에 쓰는 깃대와 주옥(珠玉)· 비취(翡翠) 등을 박세무가 가져다가 죄다 불살라버리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그 폐단이 없어졌다. 일찍이 『동몽선습』을 지어서 자제를 가르쳤는데, 나중에 세상에 널리 간행되었다. 글을 지으면 곧잘 직서(直書)하였으므로 훈구파(勳舊派) 김안로(金安老)를 비난하다가 그에게 중상당하여 마전군수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훈구파 이기(李芑)가 재상이 되어 그를 끌어들이려고, 여러 번 말하기를, “반드시 나에게 중용(中庸)을 배워야 한다.” 하니, 그가 분개하고 탄식하다가 고을 수령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였다. 그는 ‘소요당(逍遙堂)’이라 자호(自號)하여 자기 뜻을 보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은 그가 이은(吏隱: 하급 관리로 몸을 숨김)한다고 여겼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신혈리(神穴里)의 언덕에 있는데,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사후에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청도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