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74년(성종5)~1530년(중종25) = 57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이름은 박상(朴祥) 혹은 박상(朴詳).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전라도 유일(遺逸) 박정(朴禎)의 아우이고, 도승지(都承旨) 박우(朴祐)의 형이다. 충암(冲菴) 김정(金淨)·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중종 때 ‘10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6년(연산군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군7)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서 박사(博士)·교검(校檢)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를 거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1505년(연산군11)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다.
[중종 초기 활동]
1505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1506년(중종1) 장흥고(長興庫) 영(令)에 임명되었다. 1507년(중종2)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는데, 종친(宗親)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다. 1508년(중종3)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좌천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에서 대간(臺諫)의 관원을 마음대로 외관(外官)에 의망(擬望)할 수 없다는 논란이 일어나자, 종묘서(宗廟署) 영(令)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곧이어 소격서(昭格署) 영(令)으로 옮겼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전라도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갔다. 3년 임기를 채우고 바로 고향 광산(光山)으로 돌아가서 임백령(林百齡)과 같은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1511년(중종6)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에 임명되고, 교리(校理)로 승진하였으며, 1512년(중종7)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 이때 관중(館中)에서 상소할 일이 있으면 동료들이 반드시 그에게 글을 부탁하였는데, 당장 지필(紙筆)을 잡고 글을 쓰면, 문장이 유려(流麗)하고 간략하였으나 그 뜻이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응교로 있을 때 노모(老母)를 위하여 사직하는 장계(狀啓)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고향과 가까운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임명되었다.
[중종 중기 활동-단경왕후 복위 운동]
1515년(중종10) 담양부사 박상(朴祥)은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 직후에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또한 훈신(勳臣)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이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國母)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大司憲)권민수(權敏手)와 대사간(大司諫)이행(李荇) 등이 이를 사악한 의논이라고 탄핵하여, 오히려 박상은 남평(南平)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일설에는 박상 등이 중종의 뜻을 은밀히 받들어 상소하였다고도 하는데, 중종은 훈신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박상 등을 유배시킬 수밖에 없었다. 1557년(명종12) 단경왕후 신씨는 복위되지 못한 채 나이 71세로 죽었는데, 1698년(숙종24) 현감(縣監)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위호(位號)를 회복하였다. 단경왕후의 복위는 박상과 김정이 발의한 후 183년 만인 숙종(肅宗)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1516년(중종11) 박상은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다시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가 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으로 옮겼다. 1517년(중종12)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519년(중종14) 선공감(繕工監)정(正)이 되었다가, 1521년(중종16)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 이해 여름에 충주목사(忠州牧使)와 자리를 바꾸었으나,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치적이 훌륭하다고 보고하여, 중종이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 그 뒤에 사도시(司䆃寺)부정(副正)이 되었다가, 1526년(중종21) 문과(文科)중시(重試)에서 장원으로 뽑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527년(중종22)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조방언(趙邦彦)이 근무 평정에서 고하(考下)를 매겨서 그를 욕보였으므로, 그는 당장 사직하고 고향 광산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병이 들어, 1530년(중종25) 4월 11일 마침내 고향에서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저서인 『눌재집(訥齋集)』이 널리 유포되었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박상은 어려서 빼어난 인품이 여느 아이와 달랐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형 박정(朴禎)에게 글을 배웠는데, 조금 자라서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이 날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후대 정조(正祖)가 그의 학행(學行)과 절의(節義)에 대하여 말하기를, “문간공(文簡公) 박상에 대해서는 실로 남다른 감회를 특별히 느끼고 있다. 그의 꿋꿋한 충절과 높은 지조를 늘 탄복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과 행동에 나타난 의론과 지기(志氣)를 보더라도 필부가 일시적으로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차원이 아니다.” 하고, 『눌재집』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도록 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조선 초기 서거정(徐居正) 이후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문장의 4대가(大家)’라고 칭송 받았다. 그러나 성품이 간결하고 강직하여 그가 남을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天性)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비록 남에게 여러 번 배척을 받았으나, 그 의기(義氣)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소는 전라도 광주 방하동(芳荷洞) 봉황산(鳳凰山) 성재곡(成才谷) 언덕에 있고 조태억(趙泰億)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과 화산서원(華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