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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6년(중종11)~1586년(선조19) = 71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희정(希正)인데 초자가 이정(頤正)이었다. 호는 정암(正菴)·슬한재(璱僴齋)·의속헌(醫俗軒)·저헌(樗軒)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인데, 좌랑(佐郞) 박유(朴瑜)의 아들이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명종 시대 활동]
효행이 특출하여 일찍이 종7품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1546년(명종1) 생원시(生員試)에 첫째로 뽑혔고, 같은 해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효행이 뛰어난 사람에게 7품 벼슬을 제수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새로 급제하였기 때문에 초탁(超擢)하여 정6품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하였다. 곧이어 예조 좌랑·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지내고,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을 거쳐 공조 좌랑으로서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그 뒤 병조 좌랑을 거쳐 1548년(명종3)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해남현감(海南縣監)이 되었으나, 1550년(명종5)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2년 뒤인 1552년(명종7) 다시 홍문관 수찬으로 기용되어, 이해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홍문관 부교리(副校理)·교리(校理)·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을 지내고, 1553년(명종8)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의정부 검상,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 뒤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1554년(명종9)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 의흥위(義興衛)호군(護軍)이 되었고, 1555년(명종10)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가, 이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557년(명종12)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강원도병마절도사(江原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 직전에 삭탈관직 당하였다. 10년 뒤에 다시 기용되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충주목사(忠州牧使)와 자리를 바꾸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3) 다시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고, 그 뒤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가, 1572년(선조5)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고, 1573년(선조6)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1575년(선조8)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돌아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가,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가 되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그 뒤 형조 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어 병마절도사, 함흥부사(咸興府使)를 겸임하였다. 갈려서 돌아와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으나, 일에 연루되어 1581년(선조14) 하옥되었다가 얼마 지나서 사유(赦宥)를 받았다. 1584년(선조17) 전의 품계(品階)를 회복하고 여러 번 상호군(上護軍)·중추부 동지사·중추부 첨지사 등을 지냈다. 1586년(선조19) 3월 24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저서로는 『슬한재집(璱僴齋集)』이 있다.
[학문과 성품]
학문에 뜻을 두어 개성(開城)에 서경덕을 찾아가서 성리학(性理學)과 역학(易學)을 공부하였다. 견문이 날로 새로워져서 과거 공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학문을 깊이 음미하여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공부로 삼았다. 그는 본디 자(字)가 이정(頤正)이었는데, 서경덕 선생이 희정(希正)으로 고치고 작사(作辭)를 만들어 주었으니, 이것은 기대한 바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가 사마시에서 제 1등으로 뽑히게 되자 함께 합격한 자들이 서로 축하하며, “우리들이 무릎을 꿇기는 하였으나 이번에 장원을 얻었으니 꺾이지 않은 것이 된다.”라고 말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기질 때문에 권신(權臣)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 등에게 미움을 사서 여러 번 배척을 당하였다. 현감(縣監)이었을 때에는 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무기를 수선하고 백성에게 사예(射藝)를 가르치고 무비(武備)를 닦기에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퇴폐한 기강을 진작하여 기미를 막고 조짐을 막는 것을 선무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