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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2년(선조25)~1645년(인조23) = 54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척신(戚臣). 선조(宣祖)의 부마(駙馬).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아버지는 참찬(參贊)박동량(朴東亮)이고, 어머니는 승지(承旨)민선(閔善)의 딸이다. 박의(朴漪)·박유(朴濰)·박자(朴澬)의 형이다.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는 선조(宣祖)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딸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603년(선조36) 12세 때 선발되어,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1605년(선조38) 친공신(親功臣) 적장자(嫡長子)의 자격으로 2품계를 초자(超資)하여 종1품하 숭덕대부(崇德大夫)가 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았다. 1613년(광해군5) 폐모(廢母)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고 하여 화를 입었는데, 그도 ‘폐모론(廢母論)’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고 하여 김류(金瑬) 등과 함께 십사(十邪)로 몰려서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1625년(인조3) 회맹공신(會盟功臣)을 책봉할 때, 구공신(舊功臣)의 적장자(嫡長子)로 가자(加資) 되었으며, 혜민서(惠民署)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 1638년(인조16) 동지사(冬至使) 겸(兼)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고, 뒤에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645년(인조23) 1월 15일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4세였다.
저서에 『분서집(汾西集)』이 있다. 서예에 능하였는데, 유필로서 「참판 박이서 비(參判朴彛敍碑)」, 「영흥부사 이수준 묘갈(永興府使李壽俊墓碣)」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선조의 부마였으나, 금중(禁中)에 출입하되 매우 화려한 것은 그 마음에 든 것이 없었고 집에 있을 때에는 의복· 거마(車馬) 따위를 쓰는 것이 한미한 선비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 손님이 찾아오면 청아(淸雅)하게 앉아서 초연(超然)하였다. 젊었을 때에 이항복(李恒福)에게서 배워서 그 언행을 보고 자신을 단속한 것이 많았다. 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 등과 교유하였다. 문예(文藝)에 천부의 재주가 있었다. 그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는 뜻을 어기지 않도록 힘썼고, 또 형제에게 우애가 돈독하였으므로, 그 친애하는 모습을 보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군(安山郡) 유향(酉向)의 언덕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