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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4년(중종39)~1594년(선조27) = 5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학기(學起), 자호(自號)는 활당(活塘)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서울 출신이다. 문강공(文康公) 박소(朴紹)의 손자이고, 좌참찬(左參贊) 박동선(朴東善)의 맏형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사사하였고, 김장생(金長生)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4년(명종19) 21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21) 45세에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사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음보(蔭補)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가 되고 종부시(宗簿寺)직장(直長)으로 옮겼다가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었는데, 관아의 일이 파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을 닫고 글을 열심히 읽어서 늦게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그 뒤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24)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다가 온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등이 일본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는데, 그 중에는 “명(明)나라를 정벌하는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라는 말이 있었다. 선조가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한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는데, 당시 홍문관 수찬이었던 박동현은 “만일 명나라에 알리지 않았다가 뒷날 어떤 화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선조가 명나라에 알리기로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일본의 정황을 명나라에 미리 알린 덕분에, 후일 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1592년(선조25)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서행(西行)하였다. 그런 가운데, 대부인(大夫人)이 병란을 피한 경기의 고을에까지 왜적의 선봉(先鋒)이 미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상소하여 말미를 청해 달려가 어머니를 구원하였다. 선조 일행이 의주(義州)까지 피란하는 도중에 온갖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시의(時宜)에 맞는 진언(進言)을 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593년(선조26)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고, 교리(敎理)로 승진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어, 전란 중에 해이해진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1594(선조27)에 홍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고,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어 국정을 바로잡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과거에 합격하고 6년 동안 활동하다가 1594년 4월 17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51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동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뛰어나고 취향이 매우 발랐다. 집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히 많았다.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늘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영좌[几筵]에 가서 잔을 올렸으며 상기가 끝나고 나서도 날마다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였다. 어머니를 정성과 공경으로 섬기고, 형제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대성(臺省)에 있었던 5년 동안 위로는 임금의 덕을 논하고 아래로는 관리의 비위를 바로잡는 데 의리가 명백하고 논의가 정직하였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축하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명예를 바라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가 스스로 ‘활당(活塘)’이라고 호(號)를 삼은 것을 보면 그의 포부와 기개를 알 수 있다. 막내 아우 박동선과 우애가 참으로 돈독하였다. 맏형 박동현의 성품이 강직하여 집에서나 조정에서나 법을 지켰으므로, 좌참찬 박동선이 맏형 박동현을 아버지나 스승처럼 섬기고 종신토록 자기의 모범으로 삼았으며, 또 형의 효성과 우애를 집안 자제들에게 가르쳤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곡리(金谷里) 선영(先塋)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