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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4년(선조17)~1643년(인조21) = 60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자는 노직(魯直), 호는 대호(大瓠)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 박이서(朴彛敍)이고, 어머니는 군수(郡守) 이사율(李士栗)의 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 산직(散職)으로서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하였으므로 기용되어 장연부사(長淵府使)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당시 순검사(巡檢使)의 종사관(從事官)이었던 그는 배로써 부교(浮橋)를 만들어 상하 모든 사람들을 강화도(江華島)로 무사히 피난시켰는데, 그 공으로 장악원(掌樂院)정(正)이 되었다. 환도(還都)하여서 신천군수(信川郡守)로 나갔다가 도적떼를 잡은 공으로 1630년(인조8)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31년(인조9)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었고 이듬해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14)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으나, 이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에 임명되어 적진(敵陣)에 세 번이나 들어가서 양국의 화의를 성립시켰다.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갈 때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임명되어 세자 일행을 따라가서 후금(後金)과 조선(朝鮮) 사이의 어려운 문제를 현장에서 해결하였다. 당시 그는 피를 토하는 신병을 앓다가 3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640년(인조18)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1641년(인조19) 형조 참판으로서 의금부(義禁府) 동지사를 겸임하였고, 1642년(인조20) 병조 참판이 되었으나 병이 심하여 사직하였다. 1643년(인조21) 6월 22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60세였다.
[명· 청 교체 시기의 외교 활동]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교체 시기에 박노(朴*)는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청나라와 화친(和親)을 주장하며, 후금(後金)과의 교섭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후금의 군사가 우리나라 변방을 괴롭히자, 1631년(인조9) 회답사(回答使)· 추신사(秋信使)가 되어 평화적으로 조약을 맺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1633년(인조11) 춘신사(春信使)가 되어 후금의 심양에 가서 후금을 회유하고 돌아왔으며, 1635년(인조13) 추신사(秋信使가 되어 후금에 갔다가 사로잡혀서 심양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으로 적진(敵陣)에 세 번이나 들어가서 그들이 조약을 어기고 불법 침입한 것을 공박하다가, 40일 동안 잡혀 있으면서 화의를 성립시킨 다음에 풀려나서 돌아왔다. 이듬해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에 잡혀갈 때 우부빈객으로 따라가서 후금과 조선 사이의 어려운 문제를 교섭하여 해결하였다. 관소(館所)의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과 사서(司書) 김종일(金宗一)이 오랑캐에 빌붙어 횡포를 부리던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하다가가 실패하여, 문학 정뇌경과 서리(書吏)강효원(姜孝元)이 죽게 되었다. 사서 김종일은 “박노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는데 구원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으나, 당시 그는 양국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최명길과 손을 잡고, 우리 쪽에서 먼저 두 사람의 처형을 주장하도록 하였다. 전쟁을 피하려는 그의 뜻을 아는 자들은 김종일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품과 일화]
어려서부터 천품이 빼어났는데, 아버지 박이서가 학과(學課)의 감독을 엄격하게 하였기 때문에 학업이 일찍부터 성취되었다고 한다.
1620년(광해군12) 명나라 황제 광종(光宗)이 승하하여, 아버지 박이서가 이조 참판으로 있다가 진위사(陳慰使)에 임명되어 중국 북경(北京)에 갔었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가 요동(遼東)을 함락하였기 때문에, 육로의 길이 막혀서 돌아올 수 없었다. 1621년(광해군13) 박노는 조정에 호소하기를, “신을 선졸(船卒)로 삼아서 신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만나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1622년 조정에서 당시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으로 있던 박노를 특별히 정리부사(整理副使)에 임명하여 해선(海船)을 수선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당시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배를 타고 중국에 왕래하였는데, 정부에서 수리한 큰 배로써 중국 사신을 실어 보내고, 이어서 그 배로 우리 사신을 태워서 돌아오게 하였다. 박노가 선천에서 배를 수리하여 중국 사신을 실어 보내고, 얼마 안 되어 우리나라의 사신이 그 배를 타고 돌아왔는데, 돌아온 사신으로부터 아버지가 탄 배가 부서져서 바다물에 모두 빠져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큰 슬픔을 당하여 3년 동안 곡읍(哭泣)하고 조석으로 죽만을 먹었으며, 종신토록 물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선과 명·청 사이에 그의 외교적 활동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