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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7년(세종19)]. 조선 전기 태조(太祖)~세종(世宗) 때에 활동하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좌의정(左議政)박은(朴訔)의 아들이고, 박강(朴薑)·박훤(朴萱)의 형이다.
[세종 시대 활동]
음보(陰補)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25년(세종7) 통례원(通禮院)판사(判事)가 되었다. 그 뒤 형조 참의, 호조 참의, 이조 참의를 거쳐 1429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예조 참판이 되었다. 1430년(세종12) 동지총제(同知摠制)를 거쳐 호조 참판,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431년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는데, 1432년(세종14) 10월 야인(野人)기병(騎兵) 4백여 명이 여연(閭延)에 갑자기 침입하여 주민을 대대적으로 노략질하였다. 오랑캐의 약탈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1433년 2월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서 1434년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使)에 임명되었다. 이해 처숙모(妻叔母) 변씨(邊氏)의 노비 20여 명을 증여받기 위하여 노비문권(奴婢文券)을 위조한 일이 발각되어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1435년 경상도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으나, 1436년(세종18) 병으로 사직(辭職)하였다. 병이 점차 위독하여져서 집으로 돌아온 지 5개월 만인 1437년(세종19) 4월 12일에 죽었다.
[야인의 여연 침입과 파저강 야인 정벌]
1432년(세종14) 10월 박규(朴葵)는 평안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치계(馳啓)하기를, “야인 기병 4백여 명이 여연(閭延)에 갑자기 침입하여 주민을 노략질하므로 강계(江界) 절제사 박초(朴礎)가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포로로 잡힌 사람 26명, 말 30필, 소 50필을 도로 빼앗았지만, 전사한 자가 13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세종이 크게 노하여 곧 상호군(上護軍) 홍사석(洪師錫)을 보내어 정세를 살피게 하고 전사한 장수에게 쌀과 콩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어 박규가 다시 치계하기를, “여연과 강계 백성 중에 포로로 잡힌 자가 75명이고, 전사한 자가 48명이나 됩니다.” 하니, 세종이 영상 황희(黃喜) 등을 불러서 전사자를 구휼할 계책을 의논하였다.
1433년(세종15) 1월 의금부(義禁府)에서 평안도관찰사 박규 등이 연변(沿邊)의 성보(城堡)를 검찰하여 수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적이 침범하게 되었다고 하여 그를 잡아 와서 추국하고, 1433년(세종15) 2월 전라도 함열로 귀양보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세종은 1433년 4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최윤덕(崔閏德)에게 군사 1만 2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파저강(婆猪江: 동가강佟佳江)에 살던 건주위(建州衛)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게 하였다. 최윤덕은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야인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야인 236명을 사로잡고, 170명을 죽이고, 우마(牛馬) 170여 필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만주 부자는 도망하여 잡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