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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4년(세종16)~1509년(중종4) = 76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중종(中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자계(子啓)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박중손(朴仲孫)의 아들이고, 좌의정(左議政)신용개(申用漑)의 장인이다.
1471년(성종2)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472년 진하사(進賀使)의 부사(副使)로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473년(성종4)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쳐, 병조 참판이 되었다. 1478년(성종9)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때 성종(成宗)이 합천군(陜川郡)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된 『대장경(大藏經)』과 판자(板子) 숫자와 물목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3포(浦)의 왜인들이 이것을 약탈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479년(성종10)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가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481년(성종12) 다시 한성부좌윤이 되었다가,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1483년(성종14)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484년(성종15)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어 변방의 관방 시설과 군수물자의 확보에 힘썼다. 1486년(성종17)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시폐(時弊)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하였다. 1488년(성종19)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492년(성종23)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1)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 앞장섰는데, 그 공로로 1498년(연산군4)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참찬에 올랐다. 또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었다가, 1500년(연산군6)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502년(연산군8) 폐비윤씨(廢妃尹氏: 제헌왕후齊獻王后)의 추시(追諡)를 반대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좌천되었다. 1506년(연산군12) 중추부 판사(判事)가 되었을 때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고, 의정부 좌찬성 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509년(중종4) 윤9월 5일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 76세였다.
[묘소와 성품]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리(長興里) 언덕에 있는데, 사위 신용개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
박건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중후하며 온화하고 양순하였으며 학문에 뜻을 두어 약관(弱冠)에 학문이 성취되었다고 한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그는 벼슬살이에 부지런하고 간소하게 하였으며, 일을 처리할 때에는 민첩하고 신중했으며, 여러 조정을 내리 섬겼으나, 시종(始終) 절개와 지조가 한결 같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