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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1년(중종6)~1586년(선조19) = 7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은일(隱逸). 자는 대균(大均), 호는 연파처사(烟波處士)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전라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박우(朴祐)의 아들이고, 영의정(領議政) 박순(朴淳)의 형이다.
[중종~선조 시대 활동]
1531년(중종26)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양장(兩場)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서울에 가서 회시(會試)를 보는데, 선비 한 사람이 넘어져서 밟혀 죽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과거를 보지 아니하고 초연히 강호(江湖)에 유람하였다. 1546년(명종1) 음보(蔭補)로 선공감(繕工監)주부(主簿)에 임명되었고, 1547년(명종2) 참봉(參奉)이 되었다. 그 뒤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고산현감(高山縣監)을 지냈다.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김제군수(金堤郡守)로 나가서, 1년 동안 근무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나주(羅州)로 돌아가서 전혀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벗하여 살았다. 재덕(才德)을 감추고 사는 일이 끝까지 계속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누대(樓臺)·화석(花石)에 뜻을 붙이고 노년을 마치려고 생각하였다. 강상(江上)의 청풍(淸風)과 산간(山間)의 명월(明月)을 길이 즐기면서 술에 취하여 시를 읊었다. 1586년(선조19) 11월 7일 도교(道敎)의 처사(處士)처럼 조용히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76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신과 풍채가 빼어나고 맑으며 용모가 범상하지 않았다. 학문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날이 발전하여 번거로이 가르치지 않아도 글을 보면 이해하였다. 명성과 이익 같은 외물(外物)로써 마음을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외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세상에 드문 호걸로서 일찍 문장을 일삼아 집안의 명성을 이었는데, 문장의 골격이 범상하지 않아서 읊는 데에 나타난 것이 모두 속세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의 장편고시(長篇古詩)는 격조가 맑고 고상하였으나, 대부분 지금 전하지 않고 몇 편의 시만 전한다.
그가 죽을 때 연파정(烟波亭)에 나가 좌우 사람으로 하여금 밤새도록 가야금을 뜯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침이 되자 그가 시를 한 절구 읊기를 “지리한 병에 나을 약이 없더니[支離一疾差無藥], 영천에 와서 씻으니 옥류가 차갑구나.[歸濯靈泉玉溜寒]. 여기에서 곧 모골을 새롭게 바꾸어서[從此便敎毛骨改], 푸른 하늘 위로 난여를 타고 날아가리라.[碧雲天外駕翔鸞]” 하였는데, 이 시를 시중들던 아들이 쓰는 동안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