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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8년(선조11)~1658년(효종9) = 81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 때 활동한 무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외척 공신(功臣). 자는 중재(仲載)이고, 호는 유포(柳浦)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좌찬성(左贊成) 구사맹(具思孟)의 손자로서 대사성(大司成)구성(具宬)의 제 2자이다. 구사맹의 5녀가 인조(仁祖)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이므로, 인조의 외사촌 형이다.
[광해군 때 인조반정]
어려서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 글을 배웠으나, 얼마 뒤에 붓을 던지고 무예(武藝)를 닦아서 무과(武科)에 합격했다. 광해군 때 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로 승진하였다가 고원군수(高原郡守)·갑산부사(甲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613년(광해군5)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킬 때,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들이 모든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대궐에서 이것을 소청하는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그의 아버지 구성이 이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구성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유배될 지경에 놓였다가 곧 죽었다. 또 광해군이 인조의 친동생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 인헌왕후 소생)을 죽이는 것을 보고, 그는 숙부 구굉(具宏), 외숙(外叔) 신경진(申景禛)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처음으로 계획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그는 진도군수(珍島郡守)에 임명되었는데, 1622년(광해군14) 서인(西人) 김류(金瑬)·이귀(李貴) 등과 손을 잡으면서 구체적인 군사 동원과 거사 날짜를 서로 약속하고 진도로 돌아갔다. 1623년(광해군15) 3월 그가 진도에서 군사와 장비를 준비하여 전주(全州)에 도착하였을 때 거사가 성공하여 인조가 이미 등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어 바로 여수(麗水)로 내려가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을 장악하여 통제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임기가 만료되어, 한기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판서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어영대장(御營大將)·훈련대장(訓練大將)·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 등을 역임하여, 왕실(王室)의 외척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궁중과 사대부 사람들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배로써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무사히 강을 건너서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淸)나라와 싸울 때에는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인조를 호위하고 오랑캐 군사와 싸웠다. 그는 삼촌 구굉과 함께 훈국(訓局)이나 금위(禁衛)와 같은 중요한 직책을 서로 번갈아 맡아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1645년(인조23) 심기원(沈器遠)의 역모 사건을 적발하여 다스린 공로로 1645년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돌아가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인조가 제 2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고자 하니, 그 뜻을 받들어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하였다가, 나중에 왕으로 옹립하는 데 앞장섰다. 1646년(인조24)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 이경여(李敬輿)와 간관(諫官)홍무적(洪茂績)·심노(沈*) 등이 강빈의 옥사에 의혹이 있으므로 주벌(誅罰)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죽을 뻔하였다. 이때 구인후가 적극적으로 세 사람을 구원한 덕에 그들의 형벌이 유배에 그칠 수 있었다.
1652년(효종3) 의금부 판사를 거쳐 1653년(효종4)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그 때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김홍욱(金弘郁)이 강빈의 옥사가 무고라고 주장하다가 장살(杖殺)되었는데, 그를 적극 구원하려다가 도리어 효종의 미움을 사서 벼슬길에서 쫓겨났다. 1654년(효종6) 청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와서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되었다. 1658년(효종9) 노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81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인후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장신으로 기골(氣骨)이 장대하였는데, 호랑이 형상의 머리에 원숭이처럼 팔이 길었다. 친구들과 사귀는 데에 있어서도 생사(生死)를 함께 할 정도였다. 한번은 절친한 친구였던 윤숙(尹璛)이 광해군 때 무고한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 친척들도 감히 보살피고 돌보아주지 못하였는데, 구인후는 그가 탄 편여(箯輿)에 나아가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에 사람들이 그에게 혹시 나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의(正義)를 보면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어전에 나아가서 아뢰었는데, 비록 뇌정벽력(雷霆霹靂)과 같은 임금의 진노(震怒)가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언(直言)하였기 때문에, 대신의 위풍당당한 위엄이 있었다. 나라의 훈척(勳戚)이 되면서부터는 언제나 겸손하고 스스로 자제하기에 힘썼다.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매우 많았으나, 손님처럼 집안에 거처하면서 장부[簿書]를 보는 일이 없었고, 또 남을 사랑하고 재물을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고좌리(古佐里)의 언덕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