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91년(성종22)~1535년(중종30) = 45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유학자.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 자는 백응(伯凝), 정지(挺之)이고, 호는 병암(屛菴), 수재(睡齋)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구수담(具壽聃)의 형이다. 형제가 함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기묘사화의 현장]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처음 일어날 때 심정(沈貞) 등이 몰래 대궐로 들어가서 중종(中宗)에게 은밀히 밀지(密旨)를 받아 조광조(趙光祖) 등 수많은 사림파(士林派) 선비들을 한꺼번에 살육하려고 기도하였다. 마침 그날 밤에 숙직하던 구수복은 이조(吏曹)의 직소(直所)로부터 그러한 명령을 받고, “이와 같이 늦은 밤에 밀지의 진위를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심정 등이 북문(北門)을 빨리 열라고 협박하였으나, 그는 통부(通符)를 풀어 던지고 나와 버렸고, 심정 등이 크게 노하여 그를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영의정(領議政)정광필(鄭光弼)이 어명을 받들고 급히 대궐로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 구수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상공(相公)께서 제발 힘써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니, 영의정 정광필이 심정 등을 보고, “나이 젊은 사람들이 아직 사체(事體)를 잘 알지 못해서 그러하니, 공들이 조금 너그럽게 봐주시오.” 하고 만류하였다. 이리하여 구수복은 죽음을 면하고 고신(告身)만 빼앗겼으며, 조광조 등 사림파 젊은 선비들도 죽음을 면하고 장배(杖配)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심정·남곤(南袞) 등 훈구파(勳舊派)는 조광조 등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모두 살육하였다.
[보은의 구병산에서 은둔 생활]
구수복은 남부 지방으로 유배가던 중에 충암 김정과 교분이 두터웠던 김태암(金泰巖)이란 선비를 찾아갔다. 김태암이 그곳에서 머물러 함께 살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주(尙州)에서 곧바로 보은(報恩)의 구병산(九屛山) 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단정히 앉아서 옛날에 조광조·김정 등에게 배운 성리학을 복습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선비들에게 성리학을 깨우쳐 주었다. 그가 살던 곳의 앞에는 들판이 멀리 있고, 그 중간에는 높이가 몇 길이 되는 외로운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푸른 시내가 그 봉우리를 휘감고 흘렀으므로, 이러한 산수와 풍경을 즐기면서 살았다.
나중에 중종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당인(黨人)들을 신원(伸寃)시킬 때, 그 아우 구수담과 동료 수찬 이준경(李浚慶)의 도움을 받아서 구례현감(求禮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는 구례에 부임하여 정사에 부지런히 힘쓰다가, 1535년(중종30) 재임 중에 관아에서 죽으니, 나이가 45세였다.
[묘소와 성품]
묘소는 충청도 보은(報恩) 구병산(九屛山) 아래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구수복은 어려서부터 공부에만 힘쓰고 취향(趣向)이 매우 높았으므로 사림파의 여러 젊은 선비들이 그를 추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평하기를,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 같지만, 속마음은 대쪽같이 강직하고 굳세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