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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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담(具壽聃)

서지사항
항목명구수담(具壽聃)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00년(연산군6)~1550년(명종5) = 51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천로(天老), 호는 폄재(砭齋)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병암(屛菴)구수복(具壽福)의 아우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중종 시대 활동]
1519년(중종14) 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그 스승인 조광조 등이 화를 당하였고, 그의 형 구수복이 이조 좌랑으로서 이에 항의하다가 파직되었다. 이에 비분강개하며 과거를 보지 않고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다가, 1528년(중종23) 비로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직책을 두루 역임하고, 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33년(중종28)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부교리(副敎理)로 승진하였다. 1533년(중종28) 수찬으로 있을 때 동료 수찬 이준경(李浚慶) 함께 야대(夜對)를 틈타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당인(黨人)’들이 죄 없이 오랫동안 폐출당한 것이 억울하다고 극력 변론하고, 그들을 등용하도록 간청했다가, 훈구파 김안로(金安老) 등이 주청하여 용천(龍川)으로 귀양 갔다. 그때 구수담이 당인들의 원통한 실정을 하소연했기 때문에 중종(中宗)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사화(士禍)로 인하여 귀양 갔던 사람들을 감형하여 주었다. 이리하여 기묘년, 경진년(庚辰年), 신사년(辛巳年)의 사화로 인하여 귀양 갔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합하여 60여 호가 일시에 석방되었다. 그 뒤에 1537년(중종32) 좌의정(左議政)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구수담은 사면되어 5년만에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1538년(중종33)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 교리(敎理)가 되었다. 1539년(중종34) 홍문관 응교(應敎)로 전임되었다가, 다음해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542년(중종37)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43년(중종38)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는데, 다음해 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구수담이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훈구파 이기(李芑)의 죄를 논박하여 탄핵하였다.

[인종과 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1)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인종 때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하여 훈구파와 대립하였는데, 인종(仁宗)의 외삼촌 윤임(尹任)과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계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은 그들 사이의 권력 다툼에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을 이용하였다. 사림파는 인종을 이상적인 군주로 만들려고 하였으므로, 윤임 세력과 가까웠다.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채 못 되어 갑자기 죽고, 1545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그의 외삼촌 윤원형이 훈구파와 손을 잡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윤임 일파를 죽였는데, 이때 사림파의 당인(黨人)들이 기묘사화 때보다 더 많이 희생되었다. 일찍이 구수담은 대윤(大尹: 윤임 일파)·소윤(小尹: 윤원형 일파)의 폐단을 지적하고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므로, 요행히 화를 면하였다. 1546년(명종1)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 1548년(명종3)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그 사이 훈구파 이귀(李貴)는 우의정(右議政),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구수담이 대사헌으로 임명되었을 때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내어 살육한 정상을 자세히 밝히는 소장(疏章)을 밤새 작성하였다. 그의 형 구수복의 문인이었던 진복창(陳復昌)이 그 소장의 내용을 훔쳐보고 밤중에 이기에게 달려가서 밀고하였다. 당시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가 이를 듣고 노하여 그를 곧바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내치려고 하다가, 체포하여 강계(江界)로 귀양 보냈고, 다시 유배지를 갑산(甲山)으로 옮겼다. 1550년(명종5) 결국 구수담에게 사약(死藥)을 내려 유배지에서 사사(賜死)하였는데, 그때 구수담의 나이가 50여 세였다. 명종이 인성왕후(仁聖王后: 인종비)의 부탁을 받아들여, 앞서 내린 사약의 명령을 취소하였으나, 사자(使者)가 갑산에 도착했을 때는 그가 이미 사약을 마시고 죽은 지 22일 뒤였다.

[묘소와 성품]
귀양지 함경도 갑산에서 경기도 양주(楊州) 풍양(豐壤) 군장리(君場里)로 반장(返葬)하였다.


구수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인품은 매우 고상하고 학식이 매우 높았다. 언제나 닭이 울 때 일어나서 낯을 씻고 머리를 빗어 정신을 맑게 하고 문을 닫고 책을 보았는데, 마치 사람이 방안에 없는 것과 같이 조용하였고, 오직 연자 갓끈[蓮子纓]이 부딛히는 소리만이 바깥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는 차분하고 순박하며 방정하고 엄격한 자질로서 본래 학문을 수양한 기초가 있는데다가, 조광조·김정(金淨) 같은 대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그의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세상과 맞서서 어진 사람을 추천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쳤으며, 경연(經筵)의 자리에서는 충성스러운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보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기묘록보유(己卯錄輔遺)』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국조보감(國朝寶鑑)』
■ 『해동잡록(海東雜錄)』
■ 『월정만필(月汀漫筆)』
■ 『동각잡기(東閣雜記)』
■ 『고봉집(高峯集)』
■ 『퇴계집(退溪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