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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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맹(具思孟)

서지사항
항목명구사맹(具思孟)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31년(중종26)~1604년(선조37) = 74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버지이고, 인조(仁祖)의 외조부이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 좌랑에 발탁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두루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18)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이조 정랑·교서관(校書館) 교리(校理)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사간원 사간(司諫)·홍문관 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22) 명종(明宗)이 승하하자, 사재감(司宰監) 정(正)으로서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도랑(都郞)이 되었으며, 장례가 끝나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즉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나, 대간(臺諫)의 탄핵 때문에 교체되었다.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다시 승지(承旨)에 임명되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이어 호조 참의로 옮겼다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갔으며, 1576년(선조9)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 온 다음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경주부윤(慶州府尹)·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1590년(선조23) 좌승지(左承旨)로 발탁되고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하사 받았다. 병조 참판을 거쳐 다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592년(선조25)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의금부(義禁府) 동지사(同知事)·도총부(都摠府)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어가(御駕)를 따라 서행(西行)하다가 평양(平壤)에서 신성군(信成君)·정원군(定遠君)을 모시고 의주(義州)까지 갔으며, 또 중전(中殿)을 모시고 해주(海州)에서 머물다가 전후에 서울로 돌아와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30)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어, 왕자를 배종(陪從)하여 성천(成川)에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601년(선조34)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여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 사건을 국문하고, 그 공로로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 1602년(선조35)에 맏아들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이 귀양을 가게 되자,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한적하게 생활하였다. 평소에 산증(疝症)으로 고생하다가, 1604년(선조37) 4월 1일 돌아가니, 향년 74세였다.

[가계와 성품]
시호는 문의(文懿)다. 그는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능해군 구성이고, 막내 아들이 능성부원군 구굉이며, 다섯째 딸이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이다. 구성의 둘째 아들은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이다. 아들 구굉과 손자 구인후가 그 외사촌형 신경진(申景禛)과 함께 손잡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최초에 계획하였다. 그가 죽은 뒤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등의 원종공신에 책훈되었고, 1632년(인조10)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추대되고, 그의 다섯째 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되자, 그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득세한 능성구씨(綾城具氏)는 거의 구사맹의 후손들이다.

그는 천성이 평온하고 조용하여, 오직 고서(古書)를 탐독하였고 조용히 문필(文筆)을 스스로 즐겼고 평소의 생활에서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정성스럽고 순박한 기색이 바깥 모습에 넘쳐서, ‘대아군자(大雅君子)’의 기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시문(詩文)은 ‘6경(六經)’에 바탕을 두어 질박하고 순수한 문장을 많이 썼는데, 문집으로 『팔곡집(八谷集)』 등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팔곡집(八谷集)』
■ 『기재사초(寄齋史草)』
■ 『사계전서(沙溪全書)』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상촌집(象村集)』
■ 『포저집(浦渚集)』
■ 『약천집(藥川集)』
■ 『홍재전서(弘齎全書)』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