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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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具鳳瑞)

서지사항
항목명구봉서(具鳳瑞)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96년(선조29)~1644년(인조22) = 49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 활동한 문신(文臣). 자는 경휘(景輝)이고, 호는 낙포(洛浦)인데, 스스로 자기 호(號)를 낙주(洛洲)라고 하였다.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황해도 장단(長湍)의 낙하(洛河)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의 사위다.

[인조 시대 활동]
일찍이 석주(石洲) 권필(權韠)에게 시(詩)를 배웠는데, 시어(詩語)가 매우 해학적이어서 당시의 풍류(風流)들이 존중하는 바가 되어, 그를 모르면 서로 대화를 잘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1624년(인조2)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곧바로 예문관(藝文館)에 추천되어 한림(翰林)이 되었다. 1631년(인조9)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635년(인조13)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 뒤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1635년(인조13)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고, 이어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638년(인조16)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을 때 마침 흉년을 당하였으나, 진휼(賑恤)에 힘쓴 결과 그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기아(飢餓)를 면하게 되었다. 1642년(인조20)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가서 기민(饑民)을 구제하다가, 후금(後金)과 관계가 악화되자, 평안도 병사(兵史)에 특별히 임명되어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였다. 1644년(인조2) 1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서 격무에 시달리다가 몸이 쇠약해져 죽으니, 향년 49세였다. 인조가 부음을 듣고 한탄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구봉서가 죽었다.” 하였다

[후금과의 교섭]

구봉서는 해학적이고 외교적 수완이 있었다고 한다. 최명길(崔鳴吉)이 청(淸)나라와 화의를 주장할 때 이를 지지하였다. 최명길이 이조 판서가 되자 구봉서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는데, 후금(後金)과의 교섭에도 최명길은 그가 말하는 의견을 모두 그대로 따랐다. 호란 이후에도 후금과 교섭 문제가 복잡해지자, 최명길은 그를 특별히 비변사(備邊司) 제조(提調)로 차출하여 군국(軍國)에 관한 중대사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특별한 대우였다. 한편, 조선은 호란 이후에도 명(明)나라와 밀통(密通)을 하였는데, 청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국경으로 끌고 와서, 그 일에 대해 캐물었다. 조정에서 급히 구봉서를 평안도관찰사로 임명하여 보내니, 그는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곧바로 오랑캐의 진영에 도착하여 오해를 풀고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였다. 이때 인조는 칭찬하기를, “여러 신하들 중에서 오직 이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하였다. 그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적신(賊臣) 이계(李烓)가 국가 기밀 12개조(條)를 오랑캐에게 밀고해 바치자, 그를 즉시 잡아서 참수(斬首)하였다. 당시 청어(淸語) 통사(通事) 정명수(鄭命壽)란 자가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에게 빌붙어 온갖 횡포를 부렸는데, 그 종제(從弟)도 정명수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즉시 체포하여 효수(梟首)하였다. 관서 지방의 오랜 병폐가 되었던 관향화물(管餉貨物)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도 백성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 아울러 큰 배가 드나드는 뱃길을 처음으로 열어서 한중 무역을 편리하게 만들어 나라의 영구한 이익이 되게 하였다.

[성품과 일화]

구봉서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부적으로 총명하였으며 국량이 크고 심원(深遠)하여 외부 사람과 접촉할 적에 평안한 마음으로 남을 경계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통독하고 다시 읽는 법이 없었다. 글을 지을 때에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에 능하여, 아름다운 시문(詩文)을 해학을 섞어 지어서 명성을 떨쳤다. 관청에 근무할 때 털끝만치도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쓰는 일이 없었다. 남에게 답하는 서찰(書札)은 반드시 그 종이 끄트머리를 잘라 여백을 없애버림으로써 상대방이 거기에 쓸 말을 겨우 몇 자 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낙하면(洛河面) 남쪽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선원강도록(仙源江都錄)』
■ 『정축록(丁丑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응천일록(凝川日錄)』
■ 『계곡집(谿谷集)』
■ 『묵재일기(黙齎日記)』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川集)』
■ 『우계집(牛溪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택당집(澤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