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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7년(선조10)~1642년(인조20) = 6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척신(戚臣).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모자. 자는 인보(仁甫), 호는 군산(群山)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문의공(文懿公) 구사맹(具思孟)의 막내 아들이고, 인조(仁祖)의 외삼촌이다.
[인조반정의 계획]
어려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글을 배웠으나, 19세 때 큰 형 구성(具宬)을 따라 중국을 다녀와서, 무관으로 진출하였다. 음보(蔭補)로 선전관(宣傳官)·도총부(都摠府) 도사(都事) 등을 거쳐, 양성현감(陽城縣監)·고창현감(高敞縣監) 등을 역임했다.
1608년(선조4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장연현감(長淵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14년(광해군6) 광해군(光海君)이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모(廢母)하자 사림(士林)에서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이때 그는 모친 상중에 있었으나 그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이서(李曙)와 공모하여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작정하고, 외사촌형 신경진(申景禛), 큰 형의 아들인 구인후(具仁垕)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 능양군은 그의 누이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들이다. 처음에 체찰사(體察使) 장만(張晩)에게 거사 계획을 말하였으나 위험하다고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때마침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조옥건(趙玉乾)이 호남(湖南)의 병력을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주둔해 있었는데, 그에게 군대 동원을 부탁하였으나 그도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1623년(광해군15) 3월 서인(西人) 김류(金瑬)·이귀(李貴) 등과 손을 잡는 데 성공하여, 장단부(長湍府)의 병력을 홍제원(弘濟院)에 몰래 집결시켜,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 마침내 거사에 성공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즉위한 인조는 그에게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칭호와 능성군(綾城君)이란 작위를 내려주었다. 이괄(李适)이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에 임명되자, 그가 반역할 것을 짐작하고 임금에게 빨리 그를 도모하라고 은밀히 건의하였다. 결국 1624년(인조2)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임금을 호위하여 공주(公州)까지 따라갔다. 이괄의 반란이 평정되자,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1626년(인조4)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 구씨(具氏)가 돌아가자, 그가 장례를 도맡아 주관하였는데, 인헌왕후는 구사맹의 5녀이고 구굉의 누이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어가(御駕)를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자, 공조 판서로서 기보 3진(畿輔三鎭)의 병력을 거느리고 후금(後金) 오랑캐 군사와 싸워서 전공을 세웠으므로, 호란이 끝난 다음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전후하여 형조 판서를 세 번, 공조 판서를 네 번, 병조 판서를 두 번 각각 역임하였다. 별직(別職)으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를 비롯하여 비변사(備邊司)·훈련원(訓鍊院)·장악원(掌樂院)의 일을 맡았다. 만년에는 훈련원·어영청(御營廳)·포도청(捕盜廳)·총융청(摠戎廳) 4국(局)의 대장(大將)을 항상 겸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전의 숙위(宿衛)를 모두 그가 관할하고 책임졌다. 1642년(인조20) 11월 3일 병으로 돌아가니, 나이가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구굉의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너그럽고 공평하며 청렴하고 은혜로워서 장수와 병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벼슬길에 오른 40년 동안 청렴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지조를 잘 지켰기 때문에 당세의 명신(名臣)으로 추앙되었다. 자신이 임금의 외삼촌이었으나, 자기 누이 인헌왕후가 살던 궁전 안을 절대로 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깥 말을 궁전 안에 전하는 일도 없었다. 그가 형조에 있을 때 여러 왕자와 공주의 가인(家人)들이 일부러 법을 어기는 일이 많았는데, 그가 법에 따라 하나같이 처벌하니, 여러 권귀(權貴)들의 행패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는 조카 인조의 후견인 노릇을 하였다.
그가 젊어서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남의 아들을 유괴하여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친아비가 소송을 제기하였다. 구굉이 그 친아비를 불러서 아이의 친어미를 데려오게 한 다음에, 나이·모습이 친어미와 비슷한 다른 여자 5, 6인과 함께 섞어서 앉혀놓고, 아이에게 엄마를 찾게 하니, 아이가 곧바로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서 안기었다. 마침내 아이를 친엄마에게 돌려주고, 아기를 유괴한 사람을 체포하여 법에 따라 처벌하였다.
[묘소와 추증]
인조가 부음(訃音)을 듣고 매우 비통해 하고,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팔곡산(八谷山)에 있다.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에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