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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1(명종6)~1597년(선조30) = 4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義兵長). 자는 양정(養靜)이고, 호는 임재(任齋), 존재(存齋)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경상도 청도(淸道) 출신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김면(金沔)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자, 그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군막(軍幕)에서 도왔다. 이를 지켜본 경상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천거하여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다. 1593년(선조26) 왜란 중에 심한 흉년으로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나, 그가 관할하는 지역에서는 둔전(屯田)을 잘 경작한 덕분에 수확한 곡식이 매우 많았으므로, 굶주리는 많은 피난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1594년(선조27) 나라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할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이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이므로, 그에게 기필코 이 산성을 수비할 것을 명하고,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에게 이를 돕게 하였다. 이리하여 황석산성의 서남쪽을 곽준이 지키고 동북쪽을 백사림이 나누어 지키기로 약속하였는데, 이듬해 왜적이 크게 몰려와서 공격하자, 백사림은 성을 버리고 처자식과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곽준은 끝까지 싸우다가, 성으로 올라온 왜적에게 마침내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전 함안군수(咸安郡守) 조종도(趙宗道)도 이들과 함께 같이 있다가 죽었다.
1597년(선조30) 8월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나이 47세로 전사할 때 그 아들 곽이상(郭履常)과 곽이후(郭履厚)도 몸을 던져 아버지를 가로막고 보호하려다가 3부자가 한꺼번에 죽었다. 그때 맏딸은 여종과 함께 성을 빠져 나왔으나, 남편 유문호(柳文虎)가 왜적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성품과 일화]
곽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타고난 자질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성품이 순박하고 성실하였다. 또한, 모자라는 듯 겸손하지만 지조를 지킴은 굳건하였다. 남의 한 가지 선행이나 재주를 보면 성심(誠心)으로 좋아하고 반드시 성취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는 영달(榮達)하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장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정진하였고, 일체의 외물(外物)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었다.
[묘소와 추증]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묘소는 경상도 현풍현(玄風縣) 서쪽 화산(花山)의 선영[先兆]에 있는데,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경상도 안음현(安陰縣)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곽준 3부자의 장렬한 죽음을 들은 선조는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고, 곽준에게 병조 참의를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또 그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도 함께 병조 좌랑으로 추증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곽준을 병조 참판으로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