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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2년(연산군8)~1545년(명종즉위) = 4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인종(仁宗) 때 활동한 문신(文臣).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화인(被禍人). 자는 백유(伯瑜), 호는 경재(警齋)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인데, 세거지는 경상도 청도군(淸道郡) 대평촌(大坪村)이었으나, 출생지는 경상도 영천군(永川郡) 창수리(蒼水里)였다.
[중종~인종 시대의 활동]
1528년(중종2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535년(중종30) 성균관(成均館)박사(博士)에 임명되었고, 이어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호조 좌랑 등으로 승진하였다. 1542년(중종37)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형조 정랑·예조 정랑이 되어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543년(중종38)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다가, 성균관의 사예(司藝)·사성(司成)과 사헌부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중종은 사림파(士林派)를 많이 등용하였는데, 중종 말년에 그는 청요직을 두루 거쳐서 장래가 촉망되었다.
[명종 때 을사사화의 피화]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 공신(功臣)들은 중종의 본부인 신씨(辛氏: 단경왕후端敬王后)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계비(繼妃)를 맞이하게 하였다. 중종은 제 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에게서 인종(仁宗)을 낳고, 제 2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았다. 인종 때,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유관(柳灌) 등의 사림파를 중용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죽고 겨우 12세의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1545년(명종즉위)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윤임 일파를 반역죄로 죽이거나 귀양보냈는데,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는데, 을사사화 때 화(禍)를 당한 대윤 일파가 거의 1백여 명에 이른다, 이때 사간 곽순(郭珣)은 그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제 1차로 하옥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참혹한 장형(杖刑)을 받다가, 44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24년이 지난 뒤 명종이 죽고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그는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성품과 일화]
곽순은 항상 말하기를, “남녀가 일곱 살이 되면 같은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하며, 내외(內外)는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비록 누이의 집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내실(內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종들을 너그럽게 다루면서도 의젓한 품위를 잃지 않았고, 선대(先代)에 부리던 노복(奴僕)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상하(上下)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중용』을 더욱 좋아하여 퇴청(退廳)하면 반드시 20번씩 읽었는데 비록 밤중이 되더라도 틀림없이 그 숫자를 채운 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영천으로 돌아갈 적에 단출한 행장이 마치 벼슬하지 않은 시골 선비와 같았기 때문에 유곡(幽谷)의 관부(館夫)가 말을 가로막으면서, “사간(司諫: 곽순)의 행차가 이를 것이므로 들어 갈 수 없다.”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상도 영천군 귀룡산(龜龍山) 오복동(五福洞)의 산록에 있는데,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