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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3년(중종28)~1592년(선조25) = 60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라도 의병장(義兵長). 자는 이순(而順)이고, 호는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태사(苔槎)이다. 세계(世系)는 제주고씨(濟州高氏)에서 나왔으나, 선대에 장흥(長興)을 관향으로 받아서 장흥고씨(長興高氏)가 되었다. 전라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명종 시대 활동]
명종 때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보임되었다가, 호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560년(명종15)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좌랑, 병조 좌랑을 역임하면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명종16)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고,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서, 홍문관 부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18)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으나, 이량(李梁) 일파로 몰려서 파직당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되었다. 그는 고향 광주(光州)로 돌아가서, 경전(經典)을 탐구하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향리의 집에서 19년의 세월을 보냈다.
[선조 시대 활동]
1581년(선조14) 비로소 영암군수(靈岩郡守)로 임명되었다가, 종계변무(宗系辨誣)주청사(奏請使) 김계휘(金繼輝)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이때 성균관 직강(直講)으로서 사헌부 지평을 겸임하였다. 1582년 명(明)나라 한림편수(翰林編修) 황홍헌(黃洪憲) 등이 조선에 와서 조서(詔書)를 반포하자, 원접사(遠接使) 이이(李珥)가 고경명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천거해서 이이를 수행하게 되었다. 종부시(宗簿寺)·사섬시(司贍寺)의 첨정(僉正)을 거쳐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뒤에 한산군수(韓山郡守)·순창군수(淳昌郡守)가 되었다.
1589년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동래부(東萊府)는 바다의 관문으로서, 일본 화물(貨物)이 유통되고 객상(客商)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명목 없는 세금과 몰수된 재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고경명은 청렴결백하여 티끌하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1591년(선조24)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으로 녹선(錄選)되었으나, 언관(言官)들이 좌상 정철(鄭澈)을 논죄하면서 고경명도 정철의 추천을 받아 벼슬을 한 사람이라고 탄핵하였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 대장]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와 전(前) 나주부사(羅州府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김천일 등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담양부(潭陽府)에서 회합하고 의병을 일으켰는데, 옥과(玉果)의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그를 추대하여 의병장(義兵長)이 되었다.
전주(全州)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북상하다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손수 격문을 초안하여 여러 도에 돌리고 의병을 모았다.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기고, 금산(錦山)에 주둔한 왜적을 물리치려고, 먼저 정예한 기병(騎兵) 수백 명을 보내어 왜적이 점거한 금산성(錦山城)을 공격하였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포를 쏘아 성안을 불사르니, 왜적은 사상자가 많이 생겨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고경명은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적과 싸웠는데, 고경명은 8백여 명의 기병(騎兵)을 보내어 관군을 도왔으나, 방어사의 진지가 무너지자, 의병의 진지도 뒤따라 무너졌다.
이때에 좌우에서 고경명에게 말을 타고 진지를 뛰어넘어 도망가라고 청하자 고경명은 “내가 어찌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하겠는가?” 하였다. 휘하 사람들이 억지로 그를 부축하여 말에 태워 보냈으나 곧바로 말에서 떨어졌다. 왜적의 칼날이 고경명에게 미치려는 순간 유팽로는 “제가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길을 찾겠습니까?” 하고, 자기 몸으로 고경명에게 내려치는 칼을 가로막다가 두 사람이 함께 죽었다.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도 의병을 독려하면서 앞줄에 서서 싸우다가 죽었다. 의병이 비록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왜적의 사상자도 절반이 넘었으므로 군사를 거두어 밤중에 후퇴하였다. 당시 호남 지방을 확보하며 전국을 회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은 고경명이 금산 싸움에서 왜적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성품과 문장]
고경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와 모습이 점잖고 영특하여 학식과 도량이 넓고 깊으며, 후중하여 위엄이 있고 성실하여 가식이 없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굴신(屈伸)과 영욕(榮辱)에 있어서 항상 여유 있게 처신했다. 일에 임해서도 또한 구차스레 이해관계를 따지지 아니하였고, 사람을 대하면 별로 드러내어 웃는 적이 없어도 마음은 항상 즐겁고 평화로웠다. 평소에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녀들이 혹시 그런 말을 하면 엄하게 꾸짖었다. 관청에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간결하고 평이하게 하며 세세하게 살피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떠나간 뒤에도 백성들이 항상 그를 흠모하였다. 다른 기호(嗜好)는 없고 오직 서사(書史) 수천 권을 수장하여 항시 열람하였는데, 침식(寢食) 때문에 독서를 폐지한 적이 없었다.
고경명은 시(詩)와 글씨·그림에 능하여 조선 시대 유명한 시인 33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저서로는 시문(詩文)을 모은 『제봉집(霽峯集)』과 각처에 보낸 격문(檄文)을 모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묘소와 제향]
처음에는 고경명 부자의 시신을 몰래 금산의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었다. 40여 일이 지난 뒤에 맏아들 고종후 등이 시체를 찾아서 고향으로 운구하여 전라도 화순(和順)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다가 1609년 3월 장성(長城) 오동리(梧桐里)에 이장(移葬)하였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고경명이 순국하였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선조는 크게 애도하며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하였다. 1595년(선조28)에 그의 집에 정문(旌門)을 내렸다. 1600년(선조34)에는 광주에 사당(祠堂)을 세워 ‘포충사(褒忠祠)’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