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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3년(선조36)~1639년(인조17) = 37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 서리(書吏), 충신.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겸(兼) 사복(司僕) 강희룡(姜希龍)의 아들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측근 강승석(姜承碩)의 조부이다.
[청나라 볼모생활 중에 반역자 정명수를 고발]
1637년(인조15)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淸)나라 태종(太宗: 홍타지)의 볼모가 되어 만주 심양(瀋陽)으로 끌려갈 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세자 일행을 배종(陪從)했는데, 강효원은 시강원(侍講院)의 서리(書吏)로서 일행을 따라갔다.
그때 평안도 은산(殷山) 관노(官奴) 출신 정명수(鄭命壽)라는 자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서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복이 되었다. 정명수는 이름을 굴마홍[古兒馬紅]이라고 바꾸고 청어(淸語) 역관(譯官)이 되어, 청나라 사자(使者)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왕래하였는데, 두 나라 사이의 교섭사무가 일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인조를 능멸하고 삼공·육경을 욕하고 협박하여, 조정의 상하가 모두 모욕을 당하였으나, 누구도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 정명수는 역관 김돌이(金突伊: 金乭屎)와 함께 조선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 중에서 막대한 양의 은(銀)을 가로채고, 감과 배를 각각 1천 개씩을 훔치는 등 그 횡포가 극도에 이르렀다. 이에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이 분개하여 심양에서 정명수를 남몰래 찔러 죽이려고 하다가, 원리(院吏) 강효원(姜孝元) 등과 의논하여, 청인(淸人)을 시켜서 정명수의 모든 간악한 비행을 청나라 칸 태종(太宗: 홍타지)에게 고발하게 하였다.
[청나라 심양에서 순절]
청나라 칸 홍타지가 형부(刑部)에 명령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용골대의 압력에 의해 두 사람이 도리어 무고(誣告)한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정뇌경은 혼자 죄를 짊어지고 죽으려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혐의를 부정하였으나, 강효원은 스스로 공모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소현세자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 본국의 인조에게 구명을 요청하는 한편, 직접 청나라 칸 홍타지를 만나고자 말을 타고 가는데, 정명수와 김돌이 등이 그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용골대의 농간으로 청나라 칸을 만나지도 못하였다. 시강원의 대신 박노(朴*)가 현지에서 인조에게 치계(馳啓)하기를,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정뇌경과 강효원 두 사람의 처벌을 청나라에 요청해야 합니다.”고 주장하고, 재상 최명길(崔鳴吉)도 이를 지지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측에서 먼저 두 사람의 처벌을 요청하고 사형 집행인까지 심양에 보내자, 마침내 청나라 측에서 두 사람을 교형(絞刑)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1639년(인조17) 4월 18일 심양에서 강효원은 정뇌경을 따라서 죽음을 당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정뇌경은 태연하게 죽음을 맞았으나, 강효원은 정명수를 비호하던 대신 박노 등을 꾸짖으면서, “당신들이 어찌 차마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청나라 관리들이 정명수로 하여금 형장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법대로 교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정명수 일당이 다짜고짜 덤벼들어 두 사람의 목을 졸라 비틀어서 밧줄에 매달았다. 청나라 측은 두 사람을 지극히 잔인하게 처형하고 시신마저 돌려주지 않자, 대신 박노가 용골대에게 간청하여 그 시신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옷을 벗어서 두 사람의 시신을 감싸주고 제사를 지내면서 통곡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온 나라 사람들이 그 운구(運柩)를 지켜보면서 모두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사후의 신원과 역사적 평가]
강효원의 아내는 노비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20여 세였으나, 두 아들을 데리고 수절하면서 재가하지 않은 채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살았다. 인조 때 그 어머니와 아내에게 월름(月廩)으로 쌀 6말을 종신토록 지급하였으며, 현종 때 그 장자 강후정(姜厚精)과 장손 강차석(姜次碩)을 천민에서 벗어나게 하고, 강효원의 자손들을 대대로 도성 탕춘대성(蕩春臺城) 수문부장(守門部將)으로 임명하도록 조처하였다. 둘째 손자 강승석(姜承碩)은 사노(私奴)였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유생들에게 모금하게 하여, 금(金) 30냥을 주인에게 주고 면천시켜서 몸종처럼 항상 데리고 다녔다. 『송자대전(宋子大典)』에 보면, 제자들이 그가 몸종인가 물었을 때 송시열은 그가 몸종이 아니고 충신의 손자라고 대답하였다. 강승석은 송시열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항상 귀양지를 따라다니면서 송시열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송시열은 강효원을 엄흥도(嚴興道)·이사룡(李士龍)과 함께 “중인으로서 절의를 지킨 의사(義士)”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도 그를 일컬어 말하기를, “사대부들이 아전만도 못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는가?” 하고, 극구 칭찬하였다.
[묘소와 추증]
나라에서 그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어, 동대문 밖 광주(廣州) 해동리(海東里)에 장사지냈는데, 송시열이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그 뒤에 강효원에게 판결사(判決事)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