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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5년(선조18)~1647년(인조25) = 63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유일(遺逸). 자는 자구(子久)·자운(紫雲), 호는 복천(復泉)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대사헌 강첨(姜籤)의 아들이며, 판중추(判中樞) 강백년(姜栢年)의 4촌형이다. 부제학(副提學)신담(申湛)의 외손자이고, 이대순(李大淳)의 문인(門人)이다.
[광해군 시대 은거 생활]
젊어서 『소학(小學)』, 『심경(心經)』을 읽고 일찌감치 학문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달았다. 1609년(광해군1) 국자감(國子監)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덕신정(德信正) 이난수(李鸞壽)에게 『대학(大學)』과 『주역(周易)』을 배우고, 이대순(李大淳)에게서 『중용(中庸)』을 공부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의 정사(政事)가 점차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고향 충청도 회천(懷川)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초야의 유일(遺逸)을 등용할 때, 연기현감(燕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서 인조를 호위하였는데, 인조가 특별히 진천현감(鎭川縣監)에 임명하였으나 몇 달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신녕현감(新寧縣監)에 임명되어, 후금(後金)과 화의(和議)한다는 소식을 듣고 궐하(闕下)에 나아가서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다고 상소하였다. 그 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끝마치고, 공조 좌랑·형조 좌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33년(인조11)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弘文館)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고, 1634년(인조12년)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공신(功臣)들의 정치적 횡포와 그 폐단을 상소하였는데, 공신들의 미움을 사서, 은진(恩津)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풀려났다. 고향 충청도 회덕(懷德)에 돌아가서 10여 년 동안 은거하다가 죽으니, 나이가 63세였다.
초서에 뛰어났으며, 청빈하고 의리를 주장하여 당시 많은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성품과 일화]
강학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전(經典)에 밝았고 몸가짐이 깨끗하였으며, 말이 구차하지 않고 행실이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굽혀 남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생활이 곤궁해도 걱정하지 않았고 운수가 곤액(困厄)을 당해도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한 시대의 청렴한 선비들이 찾아오면, 그는 거문고를 타면서 그 가락에 자신의 뜻을 실어 보냈다고 한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충청도 온양군(溫陽郡) 서봉(棲鳳)의 언덕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인조 때 효자로서 정문(旌門)하여 포장하였다. 1654년(효종5)에 홍명하(洪命夏)의 상소로 신원되었고, 회덕의 용호사(龍湖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