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430년(세종12)~1486년(성종17) = 57세]. 조선 초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 활동한 문신. 자(字)는 국균(國鈞)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공조(工曹)참판(參判) 강회중(姜淮仲)의 증손자이며, 종실(宗室) 의성군(誼城君) 이심(李宷)의 사위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1) 권맹희(權孟禧)가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국왕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였는데, 옆에서 이것을 듣고도 고변하지 않았다고 하여,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어 국문을 받고 진해(鎭海)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서 고신(告身)을 되돌려 받았다.
1475년(성종6) 성주목사(星州牧使)와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가, 형조 참의, 대사간을 거쳐 우부승지,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형조 참의로 옮겼다가 1485년(성종16)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 1486년(성종17)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병으로 전라도관찰사의 별관(別館)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57세였다
[묘소와 사후의 피화]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북쪽 용보원(龍步院)의 언덕에 있는데, 이숙함(李淑瑊)이 쓴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1482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곧 제헌왕후齊獻王后)를 폐출할 당시 승지(承旨)였던 강자평은 인수대비(仁壽大妃)의 ‘윤비를 폐출하라는 교지’를 윤비에게 보여주었다고 추죄(追罪)당하였다. 이에 강자평의 직첩은 몰수되고, 과거에 급제한 아들 강형(姜詗), 강집(姜諿), 강겸(姜謙) 3형제가 처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 직첩을 되돌려 받고 신원(伸寃)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 겸(兼) 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