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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2)~1649년(인조27) = 81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군우(君遇), 호는 당암(戇庵)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주거지는 합천(陜川)이다. 시조는 강민첨(姜民瞻)인데, 고조부 강승전(姜承顓)이 합천으로 이사하였다. 아들이 전주부윤(全州府尹) 강대수(姜大遂)인데,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부자가 함께 10여 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
[계축옥사의 수난]
1613년(광해군5) 10월 사간으로 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대북파(大北波)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서자 출신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洋甲) 등의 반역을 문초하면서,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거짓 진술을 받아내었다. 이 진술을 근거로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였는데, 정인홍·이이첨 등이 이덕형을 형률로써 다스리려고 논의하였다. 강익문은 이 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인홍의 미움을 사서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1614년(광해군6)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을 죽였는데, 사간원 정언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적극 반대하다가 대역(大逆) 죄인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강익문의 아들 강대수가 정언으로서 동료 정온을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회양(淮陽)으로 유배당하였다. 그때 강익문은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결국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10여 년 동안 옥(獄)에 갇혀 지냈다.
[인조 시대 은거 생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강익문은 그 아들 강대수와 함께 풀려났다. 아들 강대수는 관직에 진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그는 원래 북인(北人)이었기 때문에 벼슬이 침체되었다. 1631년(인조9)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나, 언관(言官)들이 그를 탄핵하였으므로, 아들 강대수가 상소하여 그 전말을 자세히 진술하여 아버지를 해명하였다. 이리하여 1632년(인조10)에 통례원(通禮院)봉례(奉禮)를 거쳐 다시 제용감 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다고 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합천으로 돌아가서 한가하게 여생을 보냈다. 나라에서 80세가 넘은 노인에게 내리는 은전(恩典)에 의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49년(인조27) 노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81세였다.
[성품과 일화]
강익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남아 있다. 그는 평생토록 화려한 집을 좋아하지 않았고, 옷은 몸에 편한 것을 아무거나 입었으며 음식은 입에 맞는 것을 아무거나 먹었다고 한다. 항상 자제들에게 경계시키기를, “늙은 애비 때문에 오욕(汚辱)을 당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성질이 성실하고 신중하여 겉모양만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다. 남과 함께 말할 때에는 겉으로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경상도 의령(宜寧)의 낙동강 서쪽[洛西]에 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사후에 추은(推恩)하여 예조 판서(判書)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