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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8년(중종33)~1589년(선조22) = 5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원경(遠卿), 호는 난곡(蘭谷)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강회중(姜淮仲), 강자평(姜子平)의 후손이다. 우의정(右議政) 강사상(姜士尙)의 아들이고, 군수(郡守) 강홍덕(姜弘德)의 아버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9년(선조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고 형조(刑曹)·공조(工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좌랑(佐郞)으로 옮겼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두루 거쳤다. 이어 홍문관 교리(校理)·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고 사간원 사간(司諫),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1581년(선조14)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복을 입은 후에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 1586년(선조19)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변경(邊境)에 사변이 있어서 연해 지방의 수령들을 모두 무관(武官)으로 바꾸게 되었으므로, 교체되어 돌아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차례로 우부승지(右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를 지내고, 인천부사(仁川府使)에 임명되었다가 1589년(선조22)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52세였다. 아들 강홍덕(姜弘德)이 원종공훈(原從功勳)에 참여하게 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성품과 해학적인 삶]
성품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전한다. 천성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지는 않았으므로 마음 씀과 행동이 의리에 벗어나지 않았다. 남의 악한 것을 보면 자기 몸을 더럽힐까 꺼리었으나, 각박하게 남의 허물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감히 두려워하였으나,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또 그는 항상 술을 마시고 미친 체하고 지내니, 사람들이 그를 ‘매취(每醉)’라고 불렀다. 술에 취하면, 두 다리를 쭉 뻗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곧잘 혼자 지껄였다.
『부계기문(涪溪記聞)』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하루는 강서가 술에 취해서 길가에 쓰러져 자는데, 어린 아이들이 놀리기를, “할아버지, 길가에 드러눕지 마세요. 옥관자(玉貫子)가 깨져요.” 하니, 그는 귀찮다는 듯이 “그러면, 금관자(金貫子)로 바꾸면 되지.” 하고 돌아누웠다고 한다.
또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강서와 친구 우선정(禹性傳)의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대사성 우성전은 성질이 매우 강직하여 남의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장차 자기까지 더럽혀질까봐 두려워하여 혹은 문을 닫고 거절하거나, 혹은 대면해도 함께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은 강서가 크게 술에 취한 채 맨발로 친구 집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우선정의 눈 주위를 쓰다듬어 내리면서, “네 놈의 눈이 너무 높이 달렸으니, 내가 쓰다듬어 내려서 낮추려 한다.”라고 하니, 우선정이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의 난곡리(蘭谷里)에 있는데,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