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강백년(姜栢年)

서지사항
항목명강백년(姜栢年)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03년(선조36)~1681년(숙종7) = 79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숙종(肅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숙구(叔久), 호는 설봉(雪峰)·한계(閑溪)·청월헌(聽月軒)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시조가 강민첨(姜民瞻)이다.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 강주(姜籒)의 아들이고, 도승지(都承旨) 강선(姜銑)의 아버지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5) 25세에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전적(典籍), 병조 정랑을 거쳐서,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수찬(修撰)을 거쳐 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46년(인조24)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강빈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쫓겨났다.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가 중시(重試)에 장원하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1648년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 이때 사헌부에서 이조(吏曹) 판서(判書) 민형남(閔馨男)을 탄핵(彈劾)하면서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았으므로, 사간원 동료들과 더불어 사헌부를 논박(論駁)하니, 인조가 양사(兩司)를 억누르려고, 대사간 강백년을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천시켰다. 이때부터 그는 청선(淸選)에 들지 못하고 한직(閑職)만 20년간 맡았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3년(효종4) 좌승지(左承旨)로 발탁되었다가, 뒤이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대동법(大同法)을 충청 지방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였는데, 강백년은 대동법을 법규에 맞게 잘 실행하여 대동법을 호서 지방에 시행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시 승지(承旨), 형조 참의, 병조 참의가 되었고, 또 외방으로 나가서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현종(顯宗) 때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660년(현종1) 동지사(冬至使) 부사(副使)로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왔는데, 국가에서 지급한 노잣돈을 한 푼도 안 쓰고 고스란히 의주부(義州府)에 넘겨주어 관가 비용에 보태게 하였다. 예조(禮曹)와 승정원(承政院)을 거쳐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형조 참판,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예조 참판, 병조 참판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어 많은 선비들을 가르치며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1674년(현종15) 강백년이 예조 판서로 있었는데, 이때 청나라에서 강희제(康熙帝)의 황후(皇后: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가 돌아가자 조선에서도 상복(喪服)을 입도록 요구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따르려 하였으나 강백년은 “고례(古禮)가 아니다.”라고 반대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 현종이 죽자 그 시책문(諡册文)을 지었고, 숙종 때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가, 우참찬(右參贊)에 발탁되었는데,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중추부 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가, 좌참찬(左參贊)에 승진하였다.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고, 만년에 높은 지위에 임용되고 여러 번 문형(文衡)을 맡았다. 생전에 『한계만록(閑溪漫錄)』을 지었으며, 사후에 그의 글을 모은 『설봉유고(雪峰遺稿)』가 간행되었다.

[성품과 일화]

강백년의 성품과 학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기질이 청명(淸明)하고 품행이 단아하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척 사이에 화목하였다.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의 근원을 스스로 연구하여 그 원리를 꿰뚫었다고 한다. 그 용모는 깡마르고 행동은 신중하였으며, 눈은 광채를 쏘는 듯하였다. 걸을 때에는 입은 옷이 무거워 보였으며, 먹고 마시는 것이 몹시 적었다.


강백년의 아버지 강주(姜籒)가 선조 때 대간(臺諫)으로서 은(銀)을 뇌물로 받은 사건에 연루되어 추국(推鞫)을 받아 거의 죽을 뻔 하였기 때문에, 그는 벼슬길에 나온 이후로 일을 두려워하고 말을 삼가는 것이 특별히 심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남의 과실(過失)을 비판하지 아니하였고,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므로, 그 한고(寒苦)한 살림살이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나라의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신중을 기하였고, 자기 몸가짐은 근엄하면서도 남을 대하는 데는 화기가 넘쳤다. 자신을 절제하는 데에는 간고(簡苦)하였으나, 남과 교제하는 데에는 성의를 다하였다.

[묘소와 제향]

강백년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의랑리(義郞里) 도리산(道理山)에 있고,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1690년(숙종16)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뒤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 수안(遂安)의 용계서원(龍溪書院), 청주의 기암서원(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설봉유고(雪峯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보감(國朝寶鑑)』
■ 『잠곡유고(潛谷遺稿)』
■ 『서계집(西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집필자] 이기순